사이비 종교 제이엠에스 정명석 교주.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나는 신이다: 신이 배신한 사람들> 화면 갈무리
[숨&결] 방혜린 | 전 군인권센터 활동가·예비역 대위
‘피해자 팔이’라는 말에 아무런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는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지원단체는 피해자가 노출되는 것이 피해자에게 어떤 위험을 초래하는지 숱한 사건을 통해 잘 알고 있다. 공론화에 성공해서 얻을 수 있는 이익에 관해서도 잘 알고 있다. 피해자가 절박할수록, 이야기가 자극적일수록 그에 비례해 공론화의 유혹도 커진다. 피해자가 전면에 나선다면? 더할 나위 없다. 기자회견을 준비하면서 가장 많이 듣는 질문은 “피해자도 발언하시나요?” 혹은 “피해자 인터뷰 가능할까요?”다. 선의와 정의에서 비롯한 행동일지라 하더라도, 가슴속 저 밑에서는 내심 이 자극적인 사건이 ‘팔릴’ 수 있다는 유혹이 넘실거린다.
일단 모두의 본심이 또는 그 본심의 전부가 ‘피해자 팔이’에 있는 것은 결단코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피해자가 아무리 원한다 해도 활동가는 공론화라는 수단에 매우 신중하고 조심스럽게 접근한다. 그럼에도 돌이켜보면, 사건 해결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피해자를 소비한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반성이 남는 사건이 있다. 과거에 썼던 보도자료를 살펴보면, 과도하게 자세한 폭력에 관한 묘사나 언행이 종종 눈에 띈다. 정도를 조절했어야 했는데, 라고 자책하다가도 지나친 표현이라고 생각했던 부분이 떡하니 기사 헤드라인으로 등장한 뉴스들을 보면 씁쓸함이 밀려든다.
피해 경험담은 공론화 성공의 가장 큰 동력이다. 이야기는 스펙터클할수록 독자의 관심을 사로잡는다. 하지만 대중에게 소구하고 여론을 형성하기 위해 이야기는 자꾸 뜻하지 않게 자극적으로 만져지기 마련이다. 문제는 피해 경험담이 허구의 드라마가 아니라는 점이다. 피해자는 공론화된 상황과는 별개로 실재하는 존재로서 일상을 유지해야 한다. 그러나 눈덩이처럼 불어난 관심과 뻗어 나오는 수많은 사건 곁가지 이야기들은 순식간에 피해자의 일상을 침범할 수도 있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이야기 재생산의 사이클이 빨라진 시대엔 침범의 속도도 그만큼 빠르고, 불가역적이다. 얼굴이 공개된 성폭력 피해자들이 인터넷에서 성희롱 소재로 소모되거나 더 나아가 딥페이크나 합성 같은 디지털 성폭력에 노출되는 일도 허다하다. 공론화가 가해자 처벌을 위한 수사나 재판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친다 하더라도 피해자에게는 되레 2차 피해를 양산하는, 의도하지 않은 일들이 무궁무진하게 펼쳐진다. 이 지경에 이르면 공론화가 과연 피해자를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는지, 피해자 이야기를 ‘팔아’ 관심을 사려던 것인지 피해자 자신도 모호해진다.
한편 피해 당사자를 제외한 나머지 주변인은 양심의 가책과 다소간의 책임감을 느낄지언정, 엄밀히 말하자면 사건과 관련이 크게 없는 타인이다. 사건이 일단락되고 지원도 끝나면, 아니 사건이 진행되는 동안에도 별 상관 없는 일상을 산다. 공론화 후폭풍과 2차 피해의 주인공이 될 필요도 없다. 그래서 더더욱 신중해야 한다. 당장에는 그 고통을 함께 나눌지라도, 궁극적으로 공론화의 최종적인 책임을 지는 것은 오롯이 당사자의 몫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사이비 종교 단체 안에서 발생한 폭력과 만행을 폭로한 다큐멘터리 <나는 신이다>가 공개 이틀 만에 넷플릭스 한국 차트에서 1위를 차지했다. 영화나 드라마가 아닌 다큐멘터리임에도 불구하고 흥행에 성공한 것에는 초반 3화에 걸쳐 제이엠에스(JMS)를 다룬 게 큰 영향을 끼쳤다는 점은 부인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리고 제이엠에스 편에는 얼굴을 드러낸 피해자, 여러 성폭력 피해 사진과 비디오, 음성이 날것 그대로 ‘반복’ 재생된다. 이 다큐멘터리의 표현 방식에 관해 많은 전문가들이 여러 지적을 하고 있지만, 피해자 지원단체 출신으로 몇마디 덧붙인다. 공론화의 유혹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오랫동안 엉켜 있던 사건을 마법처럼 풀어줄 열쇠가 될 수 있다 하더라도, 항상 우선돼야 하는 것은 최후에 남겨질 피해자의 안위라는 것이다. 숱한 2차 피해와 ‘피해자 팔이’라는 자책과 비난 등 희생을 통해 가까스로 얻어낸 교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