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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동시대를 살아간다는 감각

등록 2023-03-15 18:44수정 2023-03-16 02:43

김한규 21세기 한중교류협회장(왼쪽부터), 박진 외교부 장관, 싱하이밍 주한 중국대사, 임채정 한중관계 미래발전위원회 위원장이 지난해 8월24일 오후 서울 종로구 포시즌스호텔에서 열린 한-중 수교 30주년 기념 리셉션에서 케이크 커팅식을 하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김한규 21세기 한중교류협회장(왼쪽부터), 박진 외교부 장관, 싱하이밍 주한 중국대사, 임채정 한중관계 미래발전위원회 위원장이 지난해 8월24일 오후 서울 종로구 포시즌스호텔에서 열린 한-중 수교 30주년 기념 리셉션에서 케이크 커팅식을 하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세상읽기] 조문영 | 연세대 문화인류학과 교수

1996년 처음으로 중국 땅을 밟았다. 마오쩌둥 동상과 맥도날드가 공존하는 풍경에 기묘함을 느끼고 이듬해 베이징에 머물며 중국어를 배우기로 했다. 하지만 부모님은 출국 날짜가 다가오자 안절부절못했다. 가고 싶은 나라가 왜 하필 중국인지, 사회주의 국가에서 행여 변고를 당하진 않을지 걱정이 앞섰다. 반공을 일상 문화로 체화한 그분들에게, 중국은 수교 이후에도 여전히 두려운 ‘중공’이었다.

하지만 중국에서 보낸 그해 여섯달은 내 삶에서 가장 찬란한 시절로 남았다. 덩샤오핑 서거, 홍콩 반환 같은 굵직한 사건으로 정치적 긴장이 감돌았지만, 사람들은 생기가 넘쳤다. 충칭행 기차를 탔을 땐 한국에서 온 대학생을 보겠다고 승객들이 몰려들어 혼쭐이 났다. 잔뜩 들뜬 채 한국을 묻고 중국을 논하는 사람들과 서른시간 눈도 못 붙인 채 대화를 계속했다. 인정 넘치는 사람들은 내 안전을 우려해 도착해서도 한동안 동행을 자처했다. 여행 중 우연한 만남이 또 다른 여행으로 이어지다 보니 결국 학교가 아닌 길에서 중국어를 배웠다.

옛 기억을 떠올린 건, 최근 학교에서 교수들한테 보낸 이메일을 받고 나서다. 연구과제 보안 대책을 수립한다며 “외국(중국 등) 정부기관 및 기업 등”으로부터 공동연구나 산학협력 요청을 받았는지 알려달라는 내용이었다. ‘외국(중국 등)’이란 말을 특별히 붉은색으로 강조했다. 한·미·일 공조가 두터워지고 중국과 대립은 첨예해지는 상황이 고스란히 엿보였다. 2년 전 일본은 정보유출 의혹을 받는 중국 정부의 인재 유치 프로젝트 ‘천인계획’을 견제하기 위해 외국에서 연구비를 받을 경우 의무적으로 신고하도록 했다. 미국은 2018년 중국에 민감한 정보를 넘기거나 연구비 지원 사실을 신고하지 않으면 징역형에 처할 수 있도록 하는 ‘차이나 이니셔티브’를 시행했다가 중국 혐오를 부추긴다는 반발이 거세지자 폐기하고, 대신 자국에 대한 모든 위협에 대응하는 포괄적인 전략을 추진하겠다고 발표한 바 있다.

사실 이런 이메일이 발송된대도 중국과 협력이 갑자기 멈추는 것은 아니다. 한국연구재단은 한-중 교류사업을 종전대로 시행하고 있고, 중국 관광비자 발급이 중단된 상태에서도 대학생들은 교환학생 제도를 통해 중국을 비교적 자유롭게 드나들었다. 팬데믹으로 국경이 막히고 국제정치의 부침이 심한 와중에도 양국 교류는 온·오프라인에서 계속 이어졌다.

하지만 1997년 중국에 관한 호기심으로 가득했던 나는 ‘죽의 장막’을 넘는 딸을 걱정하던 부모님을 닮아가는 것 같다. 중국 친구들한테 위챗으로 안부를 묻는 게 조심스럽다. 광둥성 선전 폭스콘 공장지대에서 해온 현장연구를 토대로 책을 쓸 계획도 접었다. 연구를 허락해준 사람들에게 해가 될까 근심이 쌓였다. 시진핑 체제 이후 견고해진 검열과 억압 조치를 고려하면 노파심이라고만 볼 순 없다. 하지만 바로 그 체제 속에서 ‘애국주의 홍위병’으로 자랐다는 청년세대가 지난해 말 중국 주요 도시와 대학에서 ‘백지시위’를 주도해 제로코로나 정책을 끝내지 않았던가. 나한테 점점 멀게 느껴지는 작금의 중국이 3주간 격리를 마다하지 않고 그곳에 건너간 한국의 대학생한테는 제 삶에서 가장 찬란한 기억으로 남을지 누가 알겠는가.

팬데믹 이후 중국에 대한 우리의 이해는 전례 없이 협소해졌다. 앎은 어차피 부분적이지만, 중국 영토에서 살아가는 무수한 사람들이 우리와 동시대를 살아가고 있다는 감각 자체가 무뎌지고 있다.

연결이 많아질수록 확증편향도 외려 심해지는 시대에, 마주침을 외면하기보다 꾸준히 새롭게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에 아모레퍼시픽재단 후원으로 ‘공감을 위한 한·중 대학원생 포럼’을 운영 중이다. 한국 학생과 중국 유학생이 국경 너머 ‘지구 거주자’로서의 감각과 역량을 키울 수 있도록 다양한 주제의 전문가 강연, 공동연구, 워크숍 등을 진행하고 있다. 한-중 수교 30주년이 혐중·혐한 논의에 잠식된 지난해 출발한 포럼은 시행착오도 많았지만, 한 한국 학생 말마따나 “한국과 중국을 반죽해 무언가 만들고 싶을 때 언제든 돌아가고 싶은 실험장”이 됐다. “우리가 모두 자신의 사유를 부단히 배반했으면 한다”는 한 중국 유학생의 바람은 다소 버겁기도 하지만, 한국인·중국인이기도, 연구자이기도, 청년이기도 한 학생들은 서로 부단히 마주치면서 자신과 시대를 함께 돌아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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