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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물떡 같은 어른

등록 2023-03-12 19:18수정 2023-03-13 02:34

부산 물떡어묵. 박미향 기자
부산 물떡어묵. 박미향 기자

[서울 말고] 이고운 | 부산 엠비시 피디

나는 물떡 없이 못 사는 어린이였다. 어묵 국물에 담가 익힌 가래떡 꼬치인 ‘물떡’은 부산에서 즐겨 먹는 간식이다. 국물에 푹 익어 부푼 떡을 물면 특유의 따뜻하고 삼삼한 맛이 입안 가득 퍼진다. 값도 저렴해서 동전 몇개면 언제든 그 맛을 볼 수 있었다.

겨울이면 분식집에서 고작 물떡 하나 사 먹으면서 어묵 국물을 몇번이고 다시 채워 마셨다. 나란히 서서 친구들과 요란스럽게 수다도 떨었다. 핀잔을 줄 법도 했지만 사장님은 그저 “마이 무라~”라며 어묵 국물을 연신 더 따라주셨다. 그런 관대하고 따뜻한 어른들을 만나며 자랐다.

최근 어린이보호구역 관련 취재를 하면서 어린이를 여럿 만날 기회가 있었다. 초등학교 앞을 돌아다니다 물떡을 입에 물고 있는 어린이들을 만나기도 했다. 내가 좋아했던 간식을 요즘 아이들도 먹는구나. 야무지게 물떡을 베어 물던 친구들은 낯선 나의 질문에도 곧잘 대답해주었다.

일상에서도 그렇지만, 촬영 현장에서 만나는 어린이는 더 반갑고 고마운 존재다. 보고 느낀 것을 솔직하게 말해주기 때문이다. 카메라 앞에서도 경계심보다 호기심을 나타내는 경우가 더 많다. 카메라에 대고 환한 얼굴에 손가락으로 브이(V) 자를 그리는 그들에게 어린이보호구역에서 걷는 경험에 관해 물었다. 차가 무섭고 걷기 힘들다는 대답이 많았다. 어떤 차들은 자신들을 살피지 않고 쌩쌩 지나간다고도 했다. 안전시설이 부족한 지역일수록 더 그랬다. 안전 울타리나 신호등이 없는 도로에서 어린이들은 달리는 차와 뒤섞여 걷고 있었다. 도로교통법 개정으로 차량은 어린이보호구역 안 건널목에서 무조건 일시정지 해야 하지만, 이를 지키지 않는 운전자가 많았다.

취재를 하면서 이 시대에 어린이로 사는 일에 관해 자주 생각했다. 여전히 분식집에서 물떡은 사 먹을 수 있지만, 그 물떡 같은 보드라움과 따뜻함 속에서 자라고 있을까. 매섭게 달려오는 자동차들이 그저 지나가길 기다리며, ‘노 키즈 존’이라는 영어 너머로 범접할 수 없는 세계를 마주하며, 부족하고 어설픈 초보자에 ‘-린이’를 붙인 유행어를 들으면서 말이다. 어쩐지 부끄러워졌다. 어른들이 이런저런 설명이나 이유를 댈 수야 있겠지만, 어린이들에겐 그저 변명에 불과하지 않을까.

하굣길 최고의 행복이 물떡 먹기였던 시절, 내 꿈은 막연히 좋은 어른이 되는 것이었다. 서른 중반의 나는 좋은 어른은커녕 어른이 되는 일 자체가 요원하게 느껴진다. 어린이가 보기에 영락없이 어른인 지금, 내가 만난 좋은 어른들만큼은 아니더라도 어린이에게 따뜻함을 나눌 줄 아는 어른이고 싶다. 그들은 나와 함께 이 세상을 사는 이웃이기도 하고, 존중과 환대의 경험이 쌓일수록 타인을 인정하고 관용을 베풀 수 있는 마음을 가진 어른으로 자랄 테니 말이다.

지금 이 순간을 사는 어린이들이 어디든 안전하게 갈 수 있고, 무엇이든 거침없이 경험할 수 있다면 좋겠다. 마음껏 실수하고 배워가며 성장하는 기쁨을 자유롭게 맛볼 수 있기를. 낮은 출생률이 문제라고 성화인 사회라면, 응당 어른들은 어린이들이 그렇게 자라날 수 있는 그런 세상을 만들어줘야 한다. 어린이의 안전보다 어른의 편의와 효율이 우선인 어린이보호구역, 어린이라는 이유만으로 출입이 금지되는 공간, 어린이를 낮잡아 보는 유행어가 존재하는 사회에서 더 많은 아이가 태어나야 한다고 말하는 건 염치없고 이상한 일이니까.

어른이 되긴 멀었지만 어른이 아니라고 우길 수도 없기에, 어린이를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노력부터 해보려 한다. 옆집 어린이에게 웃으며 인사하는 일부터 그들의 목소리와 진심을 방송에 담아 전하는 일까지. 언젠가는 물떡처럼 포근하고 따뜻한 진짜 어른이 될 수 있기를 소망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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