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결] 양창모 | 강원도의 왕진의사
‘어! 이게 왜 여기에?’ 처음 할머니의 욕창을 발견했을 때 믿기지 않았다. 하지만 욕창이 분명했고 매일 드레싱을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때마침 읍내 행정복지센터에서 방문간호팀을 운영하고 있기에 연락했다. 전화를 받은 방문간호사는 난처해했다. 드레싱은커녕 혈압이나 혈당을 재는 것도 안 된다고 했다. 의료법상 의료기관 밖에서 의사 지시 없이 혈압을 재는 것은 불법이라고 설명했다. 날마다 시내 병원으로 드레싱 받으러 가야 한다고 할머니를 설득하는 수밖에 없었다. ‘시내에 있는 명의가 다 무슨 소용이여!’ 결국 할머니는 힘들어서 못 간다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나이가 들수록 병원은 멀어진다. 약해진 근력과 고장 난 무릎 때문에 집에 갇혀 지내는 노인들을 수없이 본다. 병원까지 물리적인 거리는 같아도 실질적인 거리는 멀어진다. 통계청에 따르면, 보행보조기에 의지하기 시작하는 75살 이상 인구가 2045년에는 1033만명에 이르게 된다. 초고령사회란 결국 병원에서 한없이 멀어진 사람들이 다수가 되는 사회다. 그래서 시골 동네에 마을진료소를 만들자고 시청에 제안했다. 동네 마을회관에서 한두달에 한번이라도 정기적으로 진료소를 열자고 했지만 시청은 어렵다고 답변해왔다. 가장 큰 이유는 또다시 의료법이었다.
‘의료인은 의료기관 내에서 의료업을 하여야 한다’(33조)는 의료법 조항이 얼마나 많은 환자의 고통을 병원 밖에 방치하는지는 거동이 불편한 노인들의 집을 단 하루만 방문해도 알 수 있다. 집에서 나오기 힘든 장애인과 노인을 방문해 코로나 예방접종을 하자고 제안했을 때도 대답은 같았다. ‘의료법 때문에 안 된다.’ 지난 3년 동안 병원 밖에서 수많은 환자가 코로나로 쓰러져가도 의료법은 단 한줄도 변하지 않았다.
환자가 있는 곳이 곧 병원이 돼야 하는 시대가 오고 있다. 최근 입법 추진 중인 간호법안은 기존 의료법과 달리 간호행위 장소를 의료기관에서 지역사회로 확장시키려 한다. 하지만 의료법으로 인해 병원에 갇혀 있는 것은 간호사만이 아니다. 의사도 갇혀 있다. 의사들의 진료행위 장소도 의료기관에서 지역사회로 확장돼야 한다. 간호사들은 병원에서 해방시켜 지역사회로 보내겠다는 법을 만들면서도 의사들은 그대로 병원에 묶어두고 있다. 참 기이한 일이다. 지금 필요한 것은 간호사를 동네에서 병원으로 돌려보내는 것이 아니라 의사가 동네로 나와 간호사와 함께 지역사회 돌봄을 이뤄내는 것이다.
‘의사가 욕창이 아니라는데요?’ 내 의뢰서를 가지고 할머니와 함께 시내 병원에 다녀온 사회복지사가 한 얘기다. 진료실 의사의 오진이 이해 안 되는 건 아니다. 할머니는 걸어 다닐 수 있다. 흔히들 욕창은 와상 환자에게서만 생긴다고 생각한다. 진료실 안으로 멀쩡히 걸어 들어온 환자가 욕창이 생겨서 왔다고 하면 나라도 픽 웃었을 것이다.
할머니는 두 사람이 겨우 앉아 있을 수 있는 어두운 방에 온종일 앉아 있었다. 단단한 바닥에 궁둥이를 붙이고 있지 않으면 어지러워졌기 때문에 푹신한 방석도 쓰지 못했다. 그래서 욕창이 생긴 곳도, 흔히 발생하는 꼬리뼈 쪽이 아니라 앉았을 때 바닥에 닿는 궁둥뼈 부위였다. 할머니의 그런 삶을 상상하지 못하는 한 욕창이라는 진단은 상상하기 힘든 것이다.
얼마나 오랫동안 그곳에 앉아 있어야, 얼마나 오랫동안 사람이 찾아오지 않아야, 얼마나 오랫동안 먹는 것이 부실해야 욕창이 생기는 걸까. 욕창을 짓누르는 압력은 할머니의 체중이 아니라 수많은 돌봄의 부재였다.
멀쩡히 걸어 다니는 사람에게 욕창이 생겼다. 1951년 제정된 의료법에 갇힌 2023년 한국의 모습이다. 아무도 할머니를 가둔 적 없지만 할머니는 갇혀 있었다. 하지만 한국 사회는 그보다 더 어두운 곳에 갇혀 있다. 의료법은 의사의 상상력을 진료실 안으로 가둔다. 자신의 상상력 너머의 세상을 바라보길 멈춘 법은 그 자체가 감옥이다. 할머니가 속한 돌봄의 세계도 감옥이지만 그 세계를 바라보지 않는 의료법은 더 끔찍한 감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