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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권력자가 ‘벌거벗은 임금님’이 되지 않으려면

등록 2023-02-28 18:23수정 2023-03-01 02:33

[고명섭의 카이로스]
아이러니스트는 언제나 형성 중인 인간이며 자기 확신을 자기 의심을 통해 부정하고 극복하는 인간이다. 아이러니스트의 태도는 다른 누구보다 권력자에게 필요한 자질이다. 권력의 자기중심성에 갇히지 않으려면 권력자는 아이러니스트로 거듭나야 한다.

진실을 보지 못한 제 눈을 찌르고 테베를 떠나는 오이디푸스.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왕>은 비극적 아이러니의 전시장과도 같다. 위키미디어 코먼스
진실을 보지 못한 제 눈을 찌르고 테베를 떠나는 오이디푸스.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왕>은 비극적 아이러니의 전시장과도 같다. 위키미디어 코먼스

우리말로 ‘반어’(反語)라고 하는 아이러니는 속마음과는 반대로 말하는 것을 뜻한다. 김소월의 ‘진달래꽃’에 나오는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오리다”가 반어의 대표적인 시구다. 아이러니는 객관적 상황이 주관적 믿음과 모순되는 사태를 가리킬 때도 쓰인다. 현진건의 단편 ‘운수 좋은 날’에서 앓아누운 아내와 젖먹이를 두고 일터로 나온 인력거꾼은 아내가 죽은 줄도 모르고 손님에게 웃돈 받았다고 좋아한다. ‘운수 좋은 날’은 ‘가장 비통한 날’로 드러난다. 식민지 민중의 비참을 고발하는 아이러니다.

아이러니의 원형 ‘에이로네이아’(eironeia)는 고대 그리스 비극에서 볼 수 있다.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왕>은 ‘비극적 아이러니’의 전시장과도 같은 작품이다. 주인공 오이디푸스는 나라에 역병이 돌자 그 원인을 찾아내려 아폴론의 신탁을 구한다. 아폴론은 선왕 라이오스를 죽인 자를 추방해야만 역병이 가실 것이라는 신탁을 내린다. 스스로 수사관이 된 오이디푸스는 반드시 범인을 찾아내 심판하겠다고 공언한다. 이 작품을 보던 기원전 5세기 아테네 시민들은 오이디푸스 신화를 훤히 알고 있었고, 당연히 오이디푸스가 선왕을 죽인 범인이라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극 중 오이디푸스는 이 사실을 모른 채 범인을 잡아 심판하겠다고 벼른다. 여기서 첫번째 아이러니가 발생한다. 관객이 아는 것을 주인공은 알지 못한다. 이 앎의 격차에서 생겨나는 것이 비극적 아이러니다.

범인을 찾으려 분투하던 오이디푸스는 아폴론 신탁의 정확한 의미를 파악하려고 ‘눈먼 예언자’ 테이레시아스를 부른다. 진실을 아는 테이레시아스는 왕의 거듭된 추궁에 오이디푸스 자신이 범인이라는 사실을 넌지시 말한다. “그대는 가장 가까운 사람들과 가장 수치스럽게 어울리면서 그 사실을 모르고 있고, 어떤 악에 처해 있는지도 보지 못하고 있소.” 화가 난 오이디푸스는 테이레시아스가 눈만 먼 것이 아니라 귀도 혼도 멀었다고 몰아친다. 테이레시아스는 다시금 진실을 들추어내는 말을 한다. “그대는 불쌍하게도, 머잖아 이 모든 사람이 그대를 꾸짖을 말로 나를 꾸짖고 있구려.” 사람들이 오이디푸스야말로 눈도 귀도 혼도 멀었다고 비난할 미래를 예언한 것이다.

오이디푸스는 테이레시아스의 경고를 흘려듣고, 무슨 일이 있어도 진실을 밝히고야 말겠다는 각오를 다진다. 그리하여 추적자의 칼이 사태를 파헤쳐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칼날은 오이디푸스 자신의 목을 향해 다가간다. 비극의 끝에 이르러서야 오이디푸스는 자신이 범인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앎을 향한 의지’가 오이디푸스 자신을 범인으로 드러냄으로써 자기 파멸을 불러들이고 마는 것이다.

아이러니는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이 비극의 바탕이 되는 신화 전체가 아이러니의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선왕 라이오스와 왕비 이오카스테는 자식이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할 것이라는 신탁을 받고 그 운명을 피하려고 갓난아기를 산에 내다 버린다. 아기는 양치기에게 발견돼 이웃나라 코린토스 왕의 아들로 자란다. 성장한 오이디푸스는 자신이 ‘주워온 아이’라는 말을 듣고 그 말의 의미를 알아보려고 아폴론에게 신탁을 묻는다. 돌아온 답은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할 것’이라는 저주다.

오이디푸스는 이 운명에서 벗어나려고 코린토스 반대쪽으로 달아나다가 라이오스왕 일행을 죽인다. 이어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를 풀어 테베의 영웅이 되고 이오카스테와 결혼해 나라의 왕이 된다. 운명을 피하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한 것이 한치의 오차도 없이 운명을 이행하는 꼴이다. 이것이 비극적 아이러니다. 진실을 안 이오카스테는 자살하고 오이디푸스는 이오카스테의 브로치로 제 눈을 찔러 장님이 된다. 진실을 보지 못한 눈이 무슨 쓸모가 있는가.

이 비극이 상연되던 시대에 활동한 소크라테스는 또 다른 의미의 아이러니를 실행한 인물이다. <플라톤의 대화>편에서 소크라테스는 자신을 무지한 자로 낮추는 ‘에이로네이아’의 전형으로 나타난다. 이때의 에이로네이아는 ‘아닌 척함’, ‘짐짓 모르는 체함’, ‘딴청 부리고 시치미 뗌’을 뜻한다. 대화편 ‘향연’은 말들의 향연일 뿐만 아니라 에이로네이아의 향연이기도 하다. 제자 알키비아데스는 소크라테스를 두고 ‘능청 떠는 사람’이라고 묘사한다. “무지로 가장하고 친구들을 놀리는 것, 이것이 이분이 평생 하고 다니는 일이에요.”

아무것도 모르는 자의 태도로 슬며시 다가가 집요한 물음으로 결국 상대방을 넘어뜨리고 무지를 폭로함으로써 깨우침을 주는 것, 이것이 ‘소크라테스적 아이러니’다. ‘앎’은 ‘모름’으로 뒤집힌다. 이런 아이러니를 확인할 수 있는 장면이 플라톤의 다른 대화편 ‘라케스’에 나온다. 소크라테스는 ‘용기’가 무엇인지 안다는 니키아스를 헤어날 길 없는 자가당착으로 몰아넣은 뒤 결국 니키아스에게 용기가 무엇인지 모른다는 자백을 받아낸다. 어떤 것을 아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자신이 모른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다. ‘무지’에서 ‘무지의 지’로 나아가도록 이끄는 것이 소크라테스식 문답법이다.

소크라테스는 상대방보다 더 높은 곳에 있으면서도 상대방보다 더 낮은 것처럼 행동한다. 이 소크라테스적 아이러니를 문학적 기법으로 되살려낸 이들이 18세기 말 독일의 낭만주의자들이다. 비평가 프리드리히 슐레겔(1772~1829)은 잡지 <리케움>과 <아테네움>에 발표한 단편들을 통해 문학창작의 원칙으로 ‘낭만적 아이러니’를 제시했다. 소크라테스가 대화로써 무지의 상태를 깨고 더 높은 앎의 상태로 이끌어가듯이, 문학 작품도 스스로 한계를 깨고 높은 곳으로 무한히 나아가야 한다.

슐레겔이 그 방법으로 제시한 것이 ‘자기창조와 자기파괴의 반복’이다. 예술가는 내면에서 끓어오르는 창조적 열정을 쏟아부어 작품을 창작한다. 그러나 이렇게 생산된 작품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예술가는 자기 작품을 거리를 두고 관찰해 작품의 한계를 발견하고 작품의 가치를 부정한다. 예술 창작은 이런 창조와 부정의 끝없는 과정, 원심력과 구심력의 무한한 길항이다. 내부에서 외부로 자신을 발산시키는 창조의 열정이 원심력이라면, 그렇게 창조한 작품을 비판하고 부정해 자기에게 되돌아오는 것이 구심력이다. 창작 과정은 원심력과 구심력의 끝없는 싸움이다.

슐레겔은 창조와 파괴의 동거를 보여주는 사례로 ‘작가의 등장’을 든다. 작품 속에 작가 자신이 뛰어들어 자기 작품을 비판하고 그 한계를 지적하는 것이다. 앞서 고전주의 시대에 문학 작품은 작가와 엄격히 구분돼 독자적으로 존재했다. 이런 창작 관점에서 보면 작가의 개입은 일탈이고 파격이다. 그러나 슐레겔은 작가가 작품 속에 등장해 작품을 논평하고 비판하는 가운데 작품이 더 높은 차원을 향해 나아갈 수 있다고 보았다. 작가는 높은 차원에 서서 낮은 차원의 자기 작품을 내려다보며 창조와 부정을 되풀이함으로써 이상을 향해 나아간다. 이것이 ‘낭만적 아이러니’다.

여기서 필요한 것이 창조와 부정의 사이클을 만들어나가는 작가의 자기억제다. 창조적 활동을 거리를 두고 봄으로써 그 열정을 억누르고, 동시에 파괴적 활동이 완전한 파괴로 끝나지 않도록 그 열정을 제어하는 것이 자기억제다. 여기에 창작의 비밀이 있다. 자기억제는 인간의 자기창조에도 핵심 동력이 된다. 분출하는 열정과 동일한 강도로 그 열정을 제어함으로써 팽팽한 활과 같은 긴장상태를 유지하는 것이이야말로 참으로 자유로운 인간의 모습이라고 슐레겔은 보았다. 이것이 철학자 리처드 로티(1930~2007)가 말하는 ‘아이러니스트’의 모습이다. 로티의 아이러니스트는 ‘낭만적 아이러니’를 체화한 인간이다.

아이러니스트는 언제나 형성 중인 인간이며 자기의심을 통해 자기확신을 부정하고 극복하는 인간이다. 자기 자신을 객관화해 봄으로써 자기 행동에 제한을 가하고 자기를 넘어서려는 것이 아이러니스트의 태도다. 이런 태도는 다른 누구보다 권력자에게 필요한 자질이다. 권력의 자기중심성에 갇히지 않으려면 권력자는 아이러니스트로 거듭나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벌거벗은 임금님’이 대로를 활보하는 동화 속 이야기를 현실에서 목격하는 일이 벌어질 수 있다. 아이러니스트의 미덕을 갖추지 못할 때 권력자에게 남는 것은 비극적 아이러니다. 진실을 알고 정의를 안다고 자부하는 인간이 그 진실의 힘에 무장해제당하고 부정의한 인간으로 떨어진다. 한계를 모르는, 아이러니 없는 권력자에게 몰락은 필연이다.

고명섭 | 책지성팀 선임기자
<하이데거 극장-존재의 비밀과 진리의 심연>(1, 2), <니체 극장-영원회귀와 권력의지의 드라마>, <즐거운 지식>, <광기와 천재-루소에서 히틀러까지 문제적 열정의 내면 풍경>, <지식의 발견-한국 지식인들의 문제적 담론 읽기>, <이희호 평전-고난의 길, 신념의 길>을 썼다. 카이로스는 때·시기·기회를 뜻하며 현재를 밝히는 순간의 섬광을 가리킨다. 카이로스의 눈으로 철학·사상·역사를 포함한 인문학을 탐사하며 우리 시대와 대화한다.
michae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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