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결] 이주희 | 이화여대 사회학과 교수
개헌 논의가 본격화하면서 최근 김진표 국회의장이 의원 수를 늘리자고 제안했다. 국민적 지지가 낮아 본격적으로 논의하지 못할 뿐, 의원내각제와 같은 장기적인 권력구조 변경을 염두에 둔 것 같기도 하다. 그런데, 과연 제도를 바꾸면 정치가 나아질까?
대통령제가 배출한 제왕적 대통령들의 폐해로 의원내각제가 더 나은 대안이라 생각하는지 모르겠으나, 영국에서 시작된 내각제는 정당 간 협력을 보장하는 제도가 아니다. 독일이 연정을 잘한다고 정당정치의 역사와 경험이 다른 우리도 그러리라 자신할 수 없다.
내각제는 1714년 자식이 없던 앤 여왕이 죽고 왕위계승 순위에 따라 독일에서 온 새 왕 조지 1세가 영어를 하지 못하고 정치에도 관심을 보이지 않아 전문가가 행정을 맡으며 우연히 만들어진 제도다. 권력의 분산은커녕 오히려 행정권력과 입법권력의 완벽한 융합을 통해 어떤 제왕적 대통령도 꿈꾸지 못하는 강력하고 무모한 추진력을 얻기도 한다. 1980년대 영국 대처 총리가 무수한 반노동 법안 통과와 민영화, 복지예산 삭감을 통해 대처리즘을 완성한 반면, 미국 레이건 대통령은 의회의 벽을 넘지 못하고 소박하게 레이거노믹스로 만족해야 했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 시기 영국민은 대처의 신자유주의 정책을 압도적으로 지지하지 않았다. 대처와 관련된 세번의 총선에서 보수당은 모두 40% 초반의 득표율밖에 올리지 못했고 그 득표율도 계속 떨어졌지만, 노동당에서 중도세력이 분열돼 떨어져나가면서 의회 다수 의석을 어렵지 않게 거머쥐었다. 국민 과반 지지가 없어도 연정을 할 필요가 없었던 대처는 다수 국민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영국 사회를 자신이 원했던 신자유주의 날것 그대로의 모습으로 변화시켰다.
정치 제도는 그것이 배태된 사회의 정치문화와 관행으로부터 결코 자유롭지 못하다. 일본 학자 이오 준과 마스야마 미키타카는 원래 내각제는 영국처럼 수상을 중심으로 권력이 집중되는 구조이고 대통령제는 미국처럼 엄격한 삼권분립으로 권력이 분산되는 구조인데, 왜 일본의 내각제는 권력 분점에 더 효과적인 것처럼 보이고, 한국의 대통령제는 권력이 집중되는 구조인 것처럼 인식되는지 분석한 바 있다. 그들에 따르면, 일본은 고도로 자율적인 관료의 영향력이 강한 관료내각제에 가깝다. 한국은 군사정권의 군인 등용처럼 상사인 대통령이 군인이 되면 그 관계자가 관료 시스템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막을 수 있는 수단이 없다는 점이 지적됐다.
대통령제의 여소야대 국면에서도 여야 협치가 불가능하다면 내각제가 되어도 정쟁으로 날밤을 새울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 합리적인 추론일 것이다. 이미 우리 헌법에는 제헌헌법 제정 당시 내각제 초안이 대통령제로 급히 변경되면서 살아남은 국무총리제처럼 의원내각제적인 요소가 존재한다. 물론 현재는 상상하기도 어렵지만, 대통령의 의지만 있다면 의회 다수파인 야당 당대표를 국무총리로 임명하는 것이 제도적으로 불가능하지 않다.
정당 고유의 정책노선 없이 당선만을 목적으로 이합집산하는 다당제가 양당제보다 나은 점이 무엇인가? 대통령제의 부분적인 개선을 통해서도 권력집중을 완화하고 소수 정당의 목소리가 더 잘 들릴 수 있는 정책 연대의 기초를 마련할 수 있지 않은가?
제도 변경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은, 대통령의 뜻만 왕처럼 받들기보다 민의 파악에 마음을 다해 행정부 견제 역할을 제대로 해내는 정당, 특히 여당이다. 자신과 주변의 특권을 보호하며 권력을 탐하는 대신 공정하게 국민에 봉사하는 공무원의 역할에 충실한 검찰이다. 광고주와 권력의 눈치를 보지 않고 국민의 눈과 귀가 되어 진실을 찾고 전하려 애쓰는 언론이다. 기획재정부 장관의 부하가 되어 기업의 이익을 앞세우는 대신 어려운 노동자와 노동권의 보호에 최선을 다하는 노동부 장관이다. 만일 그렇지 못하다면 제도가 어떻게 바뀌어도 우리의 삶은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아, 국회의원들의 삶은 달라질 수 있겠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