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학생, 노동자, 보통 사람들, 나아가 자연의 권리와 행복을 짓밟고 그 희생을 바탕으로 가진 자나 높은 자들만의 특권을 추구하는 ‘무책임’의 경제 속에 산다. 무책임의 경제는 무한정 가능하지 않다. 이를 ‘책임성’ 있게 바꾸는 길은?
강수돌 | 고려대 융합경영학부 명예교수
사례 1. 2017년, 전주의 한 콜센터에서 일하던 특성화고 실습생 홍아무개양이 업무 스트레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 전에 아빠에게 “아빠 나 오늘도 콜 수 못 채웠어. 퇴근 늦을 것 같아”라는 문자를 보내기도 했다. 그가 일한 분야는 업무 강도가 매우 높은 ‘해지 방어’ 팀. 나 역시 콜센터 직원과 통화하는 일이 많기에 잘 알지만, 이들은 본의 아니게 고객을 위해 ‘감정노동’을 해야 한다. 이는 자기감정 억압일 뿐! 회사 쪽은 실적 압박을 가하고 고객들은 더 싼 곳으로 가려 한다. 얼마나 많은 고객을 확보하느냐보다 얼마나 많은 이탈자를 잡느냐가 홍양의 숙제였다. 통신사마다 고객 유치 전쟁이 가속화하면서 애꿎은 그가 희생되었다. 노조가 있어도 그런 경제 전쟁을 막을 순 없었고, 노동부 역시 누구나 다 하는 관행을 못 본 체했다. 심지어 실습생들이 어떤 상황에서 일하는지 세밀히 체크해야 할 학교마저 무심했다. 이 고통스러운 현실을 지울 수 없었던 홍양의 최종 선택은 자신을 지우는 것이었다. 영화 <다음 소희>(정주리 감독)는 바로 이 현실을 다룬다.
사례 2. “이대로 살 순 없지 않습니까?”라는 구호를 내걸고 2022년 6~7월 51일간 옥쇄파업을 한 노동자가 있었다. 유최안 대우조선 하청노조 부지회장이었다. 수주 물량 부족을 이유로 30% 깎인 임금 회복은 물론 하청노조 인정 등을 내세우며 투쟁했다. 그러나 “열악한 하청노동자 처지를 널리 알린 것” 외에는 별 성과가 없었다. 하청업체 사장들도, 원청인 대우조선도, 대우조선 실소유주 산업은행도, 이 전체를 총괄하는 정부도 현장 노동자들의 삶이나 투쟁엔 무관심했다. 그리고 회사 쪽은 ‘쓴맛 좀 봐라’라는 듯 하청노조 임원 5명을 상대로 470억원대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다. 그 근거는 파업 피해 시수 75만시간×6만3113원=473억원이라 한다. 파업을 부른 현실이 “이대로 살 순 없어서”였는데, 파업 뒤 현실 역시 “이대로 살 순 없게” 한다. 이런 부당한 사태를 막고자 국회에서 ‘노란봉투법’이 계류 중이다.
사례 3. ‘도이치모터스 주가조작 사건’을 심리한 서울중앙지법 형사23부(재판장 조병구)는 2023년 2월10일 주범 권오수 전 회장 등에게 ‘유죄’ 판결했다. 이 판결문에는 대통령 부인 김아무개씨가 주가조작 행위에 긴밀히 관여했다는 구체적 정황이 담겼다. 검찰이 기소한 통정·가장매매(시세 조종하거나 거래 활성화를 가장하려고 서로 짜고 사고파는 행위) 중 공소시효가 남은 게 130건이었다. 그중 유죄 판정된 것이 102건이다. 흥미롭게도 재판부는 김씨가 직접 연관된 48건(48%)을 유죄로 봤다. 김씨의 통정·가장매매는 2010년 연말께 여덟차례 이뤄졌는데, 이 기간 도이치모터스 주가는 3130원에서 4600원으로 46% 올랐다. 같은 재판에서 김씨 모친 최은순의 거래 22건도 고가매수, 물량소진, 허수매수 등 유죄 판정을 받았다. 그런데 검찰은 김씨나 최씨를 이 문제로 소환 조사하지도, 기소하지도 않았다. 그 결과 ‘12시에 만나요 주가조작, 둘이서 만납시다 통정매매’란 노래가 세계 곳곳에서 퍼진다.
사례 4. 2021년 11월 영국 글래스고에서 2주간 진행된 ‘제26차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COP26) 결과, 한국을 포함한 선진국은 2030년까지 석탄발전소를 없애야 한다. 이 상황에서 한국 정부는 노후 석탄발전소 28기를 액화천연가스(LNG)로 바꿀 계획이다. 경남 하동의 남부발전 역시 석탄발전 8기 중 6기를 2031년까지 점차 엘엔지로 바꾼다. 엘엔지 발전을 중간단계로 하고 그 이후 청정 재생에너지를 전면 도입한다는 구상이다. 그러나 이는 시간상 세계적 흐름에 맞지 않고, 더구나 엘엔지는 실체가 메탄( CH₄)이기에 지구온난화를 더 악화할 위험 물질이다. 엘엔지복합발전은 석탄발전보다 이산화탄소 배출이 약 30% 감소한다지만, 대신 이산화탄소보다 온실효과가 80배 이상 강한 메탄을 쓰기에, ‘혹 떼려다 혹 붙이는’ 꼴 (CH₄+2O₂=CO₂+2H₂O)! 엘엔지, 즉 메탄이 이산화탄소보다 80배 이상 고약하다는 것은 미국 환경보호청(EPA) 자료에 근거한다.
위 네 사례에 공통점이 있다. ‘무책임’의 경제다. 옛말에 ‘돈 나고 사람 났나, 사람 나고 돈 났지’라 했듯, 무릇 ‘경제’란 사람들이 살자고 하는 활동, 즉 죽임이 아닌 살림의 행위다. 그런데 사례 1에서처럼 기업 간 이윤 경쟁이 학생이나 노동자를 죽인다. 사례 2의 원청에서 하청까지 이어진 긴 고리가 상징하듯, 비용의 외주화, 위험의 외주화, 책임의 외주화가 일어난다. 하청노조는 원청회사와 교섭할 권리마저 부정당하고, 힘겨운 파업 뒤 서글픈 타협에도 불구하고 수백억대 손배소가 뒤통수를 친다. 사례 3은 ‘검찰 공화국’의 산 증거다. 오죽하면 ‘유검무죄, 무검유죄’란 신조어까지 나왔으랴? 원래 주식시장 자체가 자본 공화국을 위해 존재한다. 따라서 주식시장이 공정하더라도 이윤을 위해 사람과 자연이 희생당할 위험이 크다. 그런데 주가조작은 자본의 관점에서도 무책임한 행위로, 절대 용납이 안 된다. 그러나 검찰 공화국은 그조차 초월하려 든다. 무책임을 넘은 무감각! 사례 4에서는 에너지 문제와 관련해, 표리부동의 논리로 지구를 망가뜨려, 현세대만 속이는 게 아니라 미래세대까지 무책임하게 속이려 든다.
요컨대, 우리는 학생, 노동자, 보통 사람들, 나아가 자연의 권리와 행복을 짓밟고 그 희생을 바탕으로 가진 자나 높은 자들만의 특권을 추구하는 ‘무책임’의 경제 속에 산다. 무책임의 경제는 무한정 가능하지 않다. 이를 ‘책임성’ 있게 바꾸는 길은?
첫째, 법과 정의, 진실이 바로 서야 한다. 경찰, 검찰, 법원이 바로 서야 하고, 언론과 학계가 바로 서야 한다. 돈과 권력에 중독된 자들이 엘리트로 통하는 세상에선 아무 희망이 없다.
둘째, 엘리트만 욕할 일이 아니다. 많은 우리들 역시 돈과 권력에 중독된 자들을 미워하면서 시나브로 닮아간다. ‘강자 동일시’다. 뼛속까지 내면화해버린 이것을 철저히 털어내지 않으면, 엘리트 위주의 세상을 바꿀 수 없다. 민주주의를 이루려면 ‘민’이 병들어선 안 된다.
셋째, 힘겹게 쟁취한 민주주의조차 자본의 돈벌이 원리 탓에 망가지기 일쑤다. 따라서 상품, 가치, 노동, 화폐, 자본 등 물신에 지배당한 사회적 관계 전반을 구조적으로 바꾸어야 한다. 더 이상 사람과 공동체, 자연에 비용, 위험, 책임을 전가하지 않는 삶의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 부지런히 공부하고 토론하면서 새로운 세상을 실험하고 상상해나가야 한다. 당대가 못다 하면 후대가 이어가면 된다. 삶은 결과보다 과정이 중요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