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꽝남성 퐁니마을 집에 머물던 응우옌티탄이 지난 7일 승소 판결 뒤 변호인단과 화상 연결에서 소감을 밝히고 있다. 베트남전쟁 문제의 정의로운 해결을 위한 시민사회 네트워크 제공
[세상읽기] 임재성 | 변호사·사회학자
평화란 무엇일까. 평화롭다는 상태란 무엇일까. 철학자 에마뉘엘 레비나스의 ‘비폭력’에 대한 설명을 조금 변형해서 정의해보면 이렇다. ‘내가 누군가에게 폭력을 당할 수 있다는 두려움’(피해자로서의 불안함)과 ‘내가 누군가에게 폭력을 가할 수 있다는 두려움’(가해자로서의 불안함) 사이의 팽팽한 긴장 상태. 일견 평화와 전혀 상관없을 것 같은, 이 불편한 두려움을 함께 품고 그 사이에서 갈등할 때, 비로소 ‘평화’라는 상태가 유지될 수 있다.
피해자가 될지 모른다는 두려움만이 압도적인 사회는 폭력으로 나아간다. 2011년 5월 미국 젊은이들은 거리로 뛰쳐나와 얼싸안고 환호성을 지르며 월드컵 응원 도구 부부젤라를 불었다. 오사마 빈 라덴이 사살됐다는 소식을 듣고서다. 3천여명이 희생당한 2001년 9·11테러 이후 미국 사회는 추가 테러의 공포가 가득했다. 미국은 즉시 ‘테러와의 전쟁’이라는 이름으로 다른 나라에 폭격을 시작했고, 9·11테러와 상관없는 이라크까지 침공했다. 결국 10여년 전쟁 끝에 테러 주범을 죽였다. ‘이제 죽지 않을 수 있다’며 기뻐했다.
미국은 더는 피해자가 되지 않겠다며 몇명을 죽였을까. 미국 브라운대 연구에 따르면, 테러와의 전쟁에서 죽어간 이라크, 아프가니스탄, 예멘 등의 사람은 90만명 전후로 추산된다. 부부젤라를 신나게 불었던 미국인들에게, 피해자의 두려움과 길항하고, 폭력의 선택을 저어하게 하는 가해자로서의 불안함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테러와의 전쟁 초기 “다 같이 슬퍼하자, 그러나 다 같이 바보는 되지는 말자”(수전 손택)는 주장도 있었다. 무차별 군사대응엔 수많은 민간인 피해가 뒤따르고, 테러로 테러를 이기고자 하는 꼴이라는 가해자의 두려움을 담은 목소리. 그러나 미국 사회 압도적 다수는 이 목소리에 ‘테러 옹호’라는 경멸의 딱지를 붙여 공론장에서 쫓아냈다. 한 사회가 폭력으로 치달아가는 과정이었다.
지난 7일, 서울중앙지법은 베트남전 민간인 학살 피해자의 국가배상 소송에서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을 인정하고, 피고 대한민국의 법적 책임도 존재한다 판단했다. 이 판결은 무엇보다 오랜 시간 고통받은 베트남 피해자의 권리를 인정한 최초의 역사적 판결이다. 동시에 한국이라는 공동체를 위한 판결이기도 하다. ‘가해자의 자리’를 만들어낸 판결.
한국 사회는 가해자로서의 두려움이 희박한 사회다. 한국은 식민지와 전쟁이라는 극단적 폭력 한가운데에서 형성됐다. 국가 정체성 중 하나인 반공주의는 ‘빨갱이들이 우리를 죽인다’는 공포로 작동돼왔다. 그 공포 속에서 한국 현대사의 수많은 폭력이 정당화됐다. 뒤늦게 폭력의 진실이 밝혀진 뒤에도 구성원들은 스스로를 피해자와 쉽사리 동일시했다. 4·3을, 5·18을 잊지 말자고 외치면서도 그 누구도 육지에서 제주로 건너간 토벌대들, 전남도청으로 돌진하는 공수부대원들의 자리에 서지 않았다. 일본으로, 미국으로, 군사독재로 가해의 주체를 타자화할 뿐.
베트남전 문제는 다르다. 피해자의 다른 국적, 다른 언어, 먼 거리감으로 인해 그들과 자신을 동일시하며 역사적 비극을 죄책감 없이 사유하긴 불가능하다. 과거의 일이라 외면하기도 어렵다. 베트남전에 대한 한국의 공식 평가는 ‘전쟁 특수로 벌어들인 외화로 눈부신 경제성장을 했다’이다. 한국 사회가 지금 누리는 성취에 베트남 학살 피해자들의 죽음과 고통이 최소한 얼마쯤은 존재한다.
이번 판결로 부재해왔던 가해자의 자리는 조그맣게나마 만들어졌지만, 그 자리에 선다는 것은 또 다른 문제다. 누군가 그 자리에 선다면, 던질 수밖에 없는 질문은 ‘우리는 그들을 왜, 어떻게, 얼마큼 죽였을까’이다. 이 불편하고 두려운 질문을 부득불 피하지 않고 계속 던질 수 있는 만큼 평화로 갈 수 있다. 이 질문은 방아쇠에 걸린 손가락을 빼기 위해 지금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역사학자 후지이 다케시는 ‘가해자가 된다는 것은 주권자가 된다는 것’이라고 했다. 가해자는 자신의 행동을 자신의 결정과 책임으로 인정해야 한다. 가해자는 자신이 당길 방아쇠의 무게를 느낄 수밖에 없다. 그래서 멈출 수도, 진정한 사과를 할 수도 있다. 이렇게 멈추고 반성하는 힘을 익히고 잊지 않는다면, 한국 사회는 쉽사리 폭력과 전쟁으로 나아가지 않을 것이다. 부디 많은 이들이 가해자의 자리에 서는 용기를 내주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