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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자립, 강박이 아닌 새출발이 될 수 있도록 [숨&결]

등록 2023-02-20 18:41수정 2023-02-21 02:37

대중/자립준비청년 당사자 참여로 미디어 속 부정적으로 그려진 ‘고아 캐릭터’ 장면을 긍정적으로 바꿔 그린 ‘미디어 패러디 일러스트 프로젝트’ 이미지 모음. 아름다운재단 제공
대중/자립준비청년 당사자 참여로 미디어 속 부정적으로 그려진 ‘고아 캐릭터’ 장면을 긍정적으로 바꿔 그린 ‘미디어 패러디 일러스트 프로젝트’ 이미지 모음. 아름다운재단 제공

[숨&결] 손자영 | 자립준비청년

만 열여덟살에 보육원에서 나와 5년 동안 가장 힘들었던 점은 내가 보육원 출신이라는 사실이었다. 보육원에서 살게 된 것도, 고3 나이에 자립한 것도 내 선택은 아니었다. 하지만 사회는 그게 내 탓인 양 날 가만두지 않았다. 학창 시절 교실에서 물건이 없어지자 도둑으로 지목당하기도 했고, 아르바이트를 구할 때 이유 없이 믿을 수 없는 사람이 되기도 했다. 누군가 내게 건넸던 ‘부모님 없이 자란 게 하나도 티가 안 난다’는 말은 과연 칭찬이었을까?

하지만 ‘고아’가 사회에서 숨어 살도록 하는 그런 요인들은, 되레 나를 드러내게 했다. 2020년부터 아름다운재단 ‘열여덟 어른’ 캠페인에 참여해 ‘자립준비청년 미디어 인식 개선 프로젝트’를 진행하기로 한 이유 가운데 하나였기 때문이다. 나 같은 당사자가 나서지 않는다면 보육원 생활과 자립준비청년의 삶을 어떻게 알릴 수 있겠나. 내가 살아온 이야기를 털어놔야 한다는 게 부담스러웠지만, 누군가의 생각을 조금이라도 바꾸고 보육원 친구, 동생들이 더 나은 환경에서 살아가도록 힘을 보탤 수 있다면….

일단 드라마, 영화, 웹툰 등 미디어 속 ‘고아’ 캐릭터를 조사해 차별적인 인식이 나타난 장면들을 모았다. 그리고 자립준비청년들과 함께 우리가 만약 미디어 종사자였다면 이 장면을 어떻게 만들었을지 그려보는 ‘미디어 패러디 일러스트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놀이터에서 ‘고아’라고 놀림당하는 장면은 환대받는 장면으로, 커서도 외로운 일상은 편견 없이 어울리는 사회 구성원 중 한명의 모습으로 바뀌었다. 프로젝트에 참여한 자립준비청년 친구들은 ‘그동안 말로 설명하지 못한 답답함이 해소됐다’ ‘나 또한 스스로 편견이 있더라’는 후기를 남겼다. 자립 과정에서 움츠러들곤 하던 이유를 톺아보는 기회가 됐다.

지난해 가을엔 ‘미디어 패러디 그리기 모임’을 열었다. “(‘검은 머리 짐승은 거두지 마라’라는 속담에 나오는) 검은 머리 짐승이라는 단어가 싫어 오랜 시간 고동색으로 염색하고 다녔어요”라는 내 말에 참가자들이 웃었다. 나 또한 함께 웃음 지었다. 드라마를 보다가 가슴이 쿵, 하고 떨어졌던 장면들도 함께 봤다. 내가 살아온, 자립하고 있는 현재의 이야기를 솔직하게 털어놨다. 참가자분들이 그려준 고아 캐릭터를 위로하고 응원하는 그림에서 이들이 내 이야기에 깊이 공감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늘 긍정적으로만 흘러가는 삶이 어디 있을까. 미디어에서 ‘고아’ 캐릭터를 무조건 긍정적으로 그리는 것을 바라지는 않는다. 그래서 미디어와 친숙한 제트(Z)세대 참가자들과 청년 토론회를 열었다. ‘표현의 자유와 상처받는 당사자 사이, 그 간극을 어떻게 좁혀나갈 수 있을까?’ ‘미디어 속 인물의 특성을 드러내는 다른 방법은 없을까?’ ‘미디어를 통해 사람들의 인식을 바꿀 수 있을까?’ 4시간 내내 열띤 이야기가 오고 갔다. “보는 것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당연한 것에 의문을 가지는 태도가 필요해요.” 솔직하게 나눈 치열한 대화 속에서 우리는 약간씩이나마 각자의 답을 찾았다.

프로젝트를 진행해온 3년여 동안의 변화가 느껴진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고아’ 대신 ‘보호종료아동’, ‘자립준비청년’이라는 말이 등장했다. 무조건적인 부정과 무조건적인 동정을 넘어 자립준비청년이 가진 어려움이 있는 그대로 나오기도 했고, 범죄자 아닌 보통의 젊은이로 성장하면서 위로받는 존재로 그려지기도 했다. 지난 연말엔 그런 좋은 캐릭터들을 선정해 ‘미디어 캐릭터 시상식’을 열었다. 작은 변화의 출발을 함께 축하했다.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동안 많은 지지자도 얻었다. 이들의 응원은 자립준비청년 당사자들의 용기로 번져갔다. 이제는 종종 아무렇지 않게 자신을 자립준비청년이라고 소개하는 친구들을 만난다. 사회적 관계 속에서 ‘자립’이, 더는 강박이 아닌 새 출발로 받아들여지는 그런 변화가 더 많아지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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