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결] 유지민 | 학교 밖 청소년·전 거꾸로캠퍼스 학생
무척 추웠던 1월 어느 날, 초·중학교 후배와 오랜만에 만났다. 점심을 먹고 영하의 날씨에 한참 야외를 돌아다니다 춥고 피곤해져 전날 미리 찾아둔 카페를 가기로 했다. 서울숲-뚝섬-성수로 이어지는 성동구에는 많은 카페가 있지만 상당수는 휠체어를 타고선 갈 수 없다. 그래서 약속 하루 전, 갈 만한 카페를 미리 찾는 데 많은 시간이 들었다. 휠체어 접근이 가능하면서 정제 밀가루를 먹지 못하는 나와 단 음식을 좋아하지 않는 동생의 취향을 만족시키는 곳이어야 했기 때문이다. 장장 3시간 동안 인터넷을 검색해서 한 그릭 요거트 카페를 발견했다. 아기자기한 분위기와 달지 않은 요거트 디저트가 마음에 들었다. 뚝섬역과도 가까워 다음 장소로 이동하기도 편해 보였다.
문제는 가게가 1.5층에 있어 계단 8개를 올라가야 한다는 점이었다. 평소 같았으면 진즉 포기하고 다른 곳을 찾았을 테지만, ‘사장님이 무척 친절하다’는 인터넷 후기들을 보며 맘을 바꿔 먹었다. 큰 도움을 바랄 순 없어도 적어도 내쫓지는 않겠다는 확신이 생겼고, 무작정 한번 가보기로 했다.
‘밑져야 본전’이란 마음으로 가게 앞에 도착해 마주한 계단은 생각보다 더 높고 가팔랐다. 후배에게 가게로 들어가 사장님을 불러달라고 부탁했다. 내 휠체어를 본 사장님은 예상대로 당황하셨지만 이내 ‘어떻게 도와드리면 될까요?’라고 말씀하셨다. 휠체어는 야외에 두고 사장님과 후배 부축을 받아 계단을 올랐다. 가게에 들어선 뒤 사장님이 주신 티슈로 층계에 쓸려 더러워진 손과 바지를 닦는 내내 기분이 무척 좋았다. 마치 게임에서 가장 어려운 퀘스트(임무)를 깬 것 같은 뿌듯함을 느꼈다. 인고의 시간을 거치고 먹는 요거트는 너무 맛있었고, 서비스로 받은 따뜻한 차까지 마시며 후배와 한참 동안 수다를 떨었다.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두시간이 흘러 다음 장소로 이동하기로 했다. 문제가 생겼다. 계단을 오르는 것보다 내려가는 게 훨씬 위험하다는 걸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것. 올라올 때처럼 부축을 받으려 했지만 자칫하면 가파른 계단에서 굴러떨어질 것만 같았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사이 사장님과 후배가 휠체어를 들고 가게까지 올라왔다. 덕분에 문 앞까지 기어가는 신세는 면했지만, 내려가기는 더 어려워졌다. 그런데 이때 옆자리에 앉아 있던 커플 손님이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다. 결국 남자 한명과 여자 세명이 힘을 합쳐 내가 앉은 휠체어를 들고 계단을 내려올 수 있었다. 너무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거듭 감사하다는 말을 반복하면서도 어안이 벙벙했다. 살면서 처음 겪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평소 외부 약속이 있을 때 조금이라도 턱이 높거나 경사가 심한 곳은 찾지 않는다. 혼자 있을 때는 당연하고, 도움을 줄 비장애인이 있다 해도 굳이 모험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번에 용기를 낼 수 있었던 까닭은 무엇일까? 모든 일은 맛있는 요거트를 먹고 싶다는 생각에서 시작됐다. 무언가 선택하는 데 있어 접근성 같은 장애와 관련된 요소가 아닌, 나의 욕구를 우선시해보고 싶었다. 다른 카페를 찾기 힘들 만큼 추웠던 날씨도 한몫했다. 하지만 무엇보다 결정적인 건 사람들에 대한 신뢰였다. 문전박대당할 수 있는 불확실한 상황에서 후기들을 읽으며 도움을 받을 수 있겠다는 믿음이 생겼고, 결국 그 믿음대로 됐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 도움 주는 사람들을 만나는 새로운 경험까지 할 수 있었다.
나에게 이야기를 전해 들은 엄마는 요거트 가게를 찾아 감사하다는 인사를 전했다. 인사를 받은 사장님이 뜻밖의 말을 했단다. “1층으로 이사 가고 싶어졌어요.”
나와 친하게 지내게 된 뒤로는 어디든 갈 때 자연스레 휠체어 접근성을 생각하고 도움이 필요한 장애인에게 자연스럽게 다가갈 수 있게 됐다는 주변 친구들이 생각났다. 이번 일을 계기로 용기를 내면 주변 사람들과 함께 환경을 바꿔나갈 수 있음을 새삼 깨달았다. 그런 용기가 모이고 변화가 모이면 ‘용기 내지 않아도 되는 세상’이 오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