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8대구지하철참사 20주기 추모위원회’가 13일 오후 대구시청 동인청사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13일부터 참사 당일인 18일까지 참사 추모 주간을 운영한다”고 밝혔다. 김규현 기자
[편집국에서] 이세영 | 전국부장
꼭 다시 묻고 싶었다. 숨 쉬는 건 여전히 버거운지, 아직도 배호·나훈아의 노래를 들어야 잠이 오는지, 잊을 만하면 나타나 ‘얼마나 잘 사는지 두고 보자’던 그분은 요즘도 꿈속을 출몰하는지, 침상 머리맡엔 16년 전 받아온 맹호도와 달마도가 지금껏 걸려 있는지, 12년 전 수술받은 암이 재발하지는 않았는지.
그를 만난 건 2012년 겨울이다. 재난 피해자가 겪는 트라우마를 취재하러 대구 집을 물어물어 찾아간 내게, 그는 대뜸 윗옷을 걷어올려 수술 자국부터 보여줬다. “위암이라카데. 걸리게 되믄 폐암일 줄 알았지, 요 밥통 쪽일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 몬했데이.”
그는 몸에서 자란 암덩어리가 그날 들이마신 유독가스 때문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다행히 수술 경과는 좋은 것 같았다. 무엇보다 두려운 건 언제 다시 돋아날지 모를 암세포가 아니라, 생업 상실로 인한 가난과 극적인 생환 뒤 시작된 환영과 악몽이라고 그는 말했다.
“가장 힘든 거? 잠을 몬 자는 거라. 무슨 짓을 해도 잠이 안 온데이. 할 수 없이 불 끄고 누버서 텔레비를 보거나 배호랑 나훈아 노래를 튼다. 그라모 새벽 2시30분쯤 돼가 겨우겨우 잠이 든다. 근데 그기 끝이 아닌 기라. 그 아지매가 일주일에 사나흘은 꼭 꿈에 나온다카이. 오죽하면 작년에 600만원 들여가 굿까지 안 했겠나.”
일이 터졌을 때 그는 부산행 기차를 타려고 동대구역으로 가는 길이었다. 공교롭게도 그가 탄 1호칸에 불이 났다. 열차가 대구지하철 1호선 중앙로역에 정차했을 때 ‘펑’ 하는 소리와 함께 객차 안에서 “불이야” 하는 고함이 터져 나왔다. 겁에 질린 사람들이 한꺼번에 출입문으로 몰려들었다. 문 앞에 서 있던 그는 철제 손잡이에 얼굴을 부딪친 뒤 정신을 잃었다. 2003년 2월18일 오전 9시53분이었다.
“한 10분쯤 지났을까? 숨을 몬 쉬겠어서 눈을 떴는데, 연기는 자욱하고 주변은 깜깜하지, 요 입 주변은 완전히 피칠갑이 된 기라. 아래쪽 앞니 6개가 그때 다 나가삔 기제. 가방에서 수건 꺼내 코하고 입하고 막고는 벽을 더듬어가 지하 2층까지 올라갔다. 매표소 앞에 차단기를 지나갈라 카는데, 누가 확 허리춤을 붙잡는 기 아이겄나? 그러더니 ‘아재요, 내 좀 살려주이소, 아재요’ 이러는 기라.”
50대 여자 목소리였다고 했다. 숨이 막히고 다리 힘이 풀려 도저히 데리고 나갈 엄두가 나지 않았단다. 손길을 뿌리쳤더니 여자 손이 그의 허리띠를 움켜쥐었다. 겁이 덜컥 났다. 본능적으로 허리띠를 풀어버렸다. 이후 기억은 흐릿하다. 어찌어찌 지하 1층을 지나 출입구 계단으로 기어갔고, 소방관의 플래시 불빛을 본 뒤 정신을 잃었다고 했다.
“꿈에 나온다, 그때 허리띠 붙잡았던 그 아지매가. 온몸에 피가 뻘게가 나타나가꼬는 ‘여자를 사지에다 내다삐고 튀아뿌더이, 어데 잘 사는지 보입시데이’ 한다. 5년 전까지는 한낮에 집 안에서도 봤다. 텔레비 보다가 갑자기 소름이 쫙 돋아 주방 쪽을 보면은 그 아지매가 서 있는 기라. 잘 아는 스님한테 얘기했더니, 저 보이제? 호랑이 그림이랑 달마도. 저거를 머리맡에다 걸어노라 카드라.”
그를 다시 만나려던 나의 바람은 성사되지 못했다. 10년 전 그가 속해 있던 모임 관계자로부터 며칠 전 전해 들은 그의 근황은, 1년 전 폐암 수술을 받았고, 거동이 불편해 요양시설에 입소했으며, 가끔 사무실로 전화해 모임 일정을 묻던 처가 쪽 인척도 연락이 끊긴 지 꽤 됐다는 정도였다. 혹시나 싶어 사정을 설명한 뒤 그와의 연결을 부탁하며 전화번호를 남겼으나, 끝내 소식은 오지 않았다.
인간관계로 인한 내상이 누구보다 깊었던 시인 김수영은 “10년이란 한 사람이 준 상처를 다스리기에는 너무나 짧은 세월”(‘누이야 장하고나’)이라고 썼다. 사람 하나가 만든 상처가 이럴진대, 불가항력의 대재난이 남긴 상흔을 치유하는 데 10년 세월은 얼마나 짧고, 또 무력한가. 그 10년이 두번 흘러 20년이 됐다.
20년 전 그가 겪은 비극을 우리는 ‘대구지하철참사’라는 이름으로 기억한다. 이틀 뒤면 참사가 벌어진 지 꼭 20년이 된다. 오지 않은 기별을 아쉬워하며 그에게 닿았으면 하는 바람의 목록을 조용히 읊어본다. 이제는 밤늦도록 티브이 틀고 잠 청하지 않기를, 새벽녘 흉몽에 가위눌리지 않기를, 더는 미안함으로 스스로를 책망하지 않기를, 부디 살아 계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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