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9 이태원 참사 유가족협의회 회원들이 6일 오후 서울광장에 마련된 이태원 참사 희생자 합동분향소에서 서울시의 시민분향소 철거 예고를 규탄하고 있다. 유가족들이 분향소를 지키겠다는 의미로 서로 목도리를 묶어서 잡고 있다.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숨&결] 박성민 | 전 청와대 청년비서관
“혹시 ○○○도 가시나요?”
밤 10시가 다 된 늦은 시각 강원도 속초 고속버스터미널 앞. 정차 중인 택시에 다가가 기사님께 숙소 위치를 설명하며 말을 걸었다. 가까운 거리면 종종 승차거부를 당하곤 하는 서울에서의 일상 때문이었다. 그런데 웬걸, 기사님의 대답이 경쾌했다. “추우실 텐데 얼른 타세요. 저희는 다 갑니다. 승차거부 이런 거 없어요.”
숙소로 향하는 택시 안, 스멀스멀 자극적인(?) 냄새가 올라오기 시작했다. 너무 늦은 시각이라 문을 연 음식점을 찾을 수 없어 터미널 인근 패스트푸드점에서 햄버거를 포장해 왔기 때문이었다. 밖은 너무 추운지라 창문을 열 수도 없었다. 미안한 마음에 다시 입을 뗐다. “죄송해요. 음식 냄새가 너무 심하죠?” 또다시 돌아온 의외의 답. “괜찮아요. 맛있겠는데요?”
뒤이어 이런저런 대화가 이어졌다. 기사님은 내게 무슨 일을 하는지, 속초엔 왜 왔는지, 얼마나 머물 예정인지 등을 질문했고 나는 편한 마음으로 답을 했다. 앞서 의외의 대답들 때문이었을까, 기사님의 질문이 선을 넘는다거나 불편하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시시콜콜 대화를 나누는 사이 택시는 숙소 앞에 도착했고, 기사님은 “속초에 오신 걸 환영해요”라는 마지막 인사를 건네고 사라졌다. 예상치 못한 환대가 녹초가 된 몸과 마음을 달래주는 듯했다.
한창 짐을 풀고 있는데 숙소 주인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찾아오는 길이 어렵지는 않았는지, 방 온도는 적당한지, 저녁식사는 어떻게 했는지 이것저것 물었다. 도착하는 시간에 맞춰 방의 온도를 따뜻하게 맞춰뒀다는 말에 나도 모르게 엷은 미소가 지어졌다. 그녀는 일출시간을 알려주며, 해 뜨는 모습을 꼭 보라며, 동해 일출의 순간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힘줘 말했다. 찌든 일상으로 복귀할 때 일출 풍경만은 가슴에 담고 가라는 호의 섞인 권유였다.
며칠 뒤 서울로 돌아가기 위해 터미널까지 이동하느라 탑승한 택시는 영랑호 주변을 지나면서 속도를 낮췄다. 아름다운 풍경을 좀 더 오래 보고 마음에 간직하라는 기사님의 배려였다. “또 오시라”는 인사도 이어졌다.
짧은 강원도 여행이었지만 그 속에서 받았던 환대를 요즘 자주 곱씹는다. 온전히 혼자이고 싶어서 떠난 여행이었는데, 외려 길목마다 만난 사람들로부터 받은 따뜻한 배려가, 그들과 나눈 온기 있는 대화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 내게 빚을 지지도 않고, 별다른 주문을 받지도 않았는데 마음을 내어주며 외지인을 받아준 얼굴들이 떠오른다.
이는 최근 서울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 때문이기도 하다. 서울시는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의 지하철 시위를 두고 ‘무관용 대응’ 입장만을 고수하고 있다. 오세훈 시장은 “전장연, 사회적 약자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서울시의 입장은 충분히 설명했고, 남은 건 전장연의 몫”이라며 물러설 것을 주장한다. 사회적 약자들에게 더는 내어줄 공간도, 향후에라도 제대로 된 개선책을 내놓으려는 적극적인 의지도 보이지 않는다. 이태원 참사 100일을 하루 앞둔 지난 4일에는 서울시청 인근에서 이태원 참사 유족, 시민과 경찰들 사이 물리적 마찰도 있었다. 유족 3명이 병원으로 이송됐다. 광화문광장에 이태원 참사 추모공간 설치를 거부한 서울시는 유족들이 설치한 분향소를 두고 ‘불법적으로 설치된 설치물’이라며 철거를 요청했다고 한다.
결국 사람에게 상처를 주는 것도, 위로가 되는 것도 사람이다. 인류학자 김현경이 쓴 <사람, 장소, 환대>에도 이런 구절이 있다. “우리는 모두 낯선 존재로 이 세상에 도착하여, 환대를 통해 사회 안에 들어오지 않았던가?”
사회적 약자와 상처 입은 유족들을 대하는 서울시는 합법이냐 불법이냐를 따질 뿐이다. “타자에게 자리를 주는 행위, 혹은 사회 안에 있는 그의 자리를 인정하는 행위”(<사람, 장소, 환대>)인 환대를 시도조차 안 하니, ‘그 자리를 인정하는 행위’에서 출발하는 ‘그 자리에 따른 권리나 주장’도 설 자리를 잃었다. 배척과 배제가 아닌 환대의 손길 속에서 그들을 진정으로 품는 사회는 언제쯤 올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