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세사기 피해자들이 지난해 12월27일 오후 정부세종청사 국토교통부 앞에서 피해 상황을 호소하는 집회를 열고 있다. 연합뉴스
[편집국에서] 김진철 | 경제산업부장
피해자들은 설움과 분노를 피울음으로 토해냈다. 전세계약을 맺은 이른바 ‘빌라왕’은 이미 세상을 떠났다. 건축주와 중개사에겐 법적 책임이 없다. 피해자들은, 건축주로부터 중개사와 빌라왕으로 이어지는 고리를 만든 분양컨설팅사의 존재조차 몰랐다. 피해자는 명확히 존재하는데, 가해자는 누구인가. 대부분이 20~30대인 피해자들은 사회 진입 초장부터 마른하늘에 날벼락을 맞은 것이다.
나는 운이 좋았을 뿐이다. 2006년 이래로 거듭된 부동산 가격 등락에 열패감과 박탈감을 이겨내기 쉽지 않았지만, 그래도 마른하늘에서 날벼락이 떨어지진 않았다. 서울 변두리와 수도권을 오갔지만 빌라왕들에게 걸려들지는 않았다. 다만 운이 좋았을 뿐이다. 집주인이, 공인중개사가 속일 리 없다는, 서푼짜리 믿음은 계약만료일까지 운 좋게 지켜졌다. 우리 대부분은 운이 그렇게 나쁘지는 않았다.
그들은 운이 나빴을 뿐일까. 집값 급등기에 갭투자가 유행하고 빌라가 대량으로 지어졌으며 감염병 시대를 거쳐 자산가격은 치솟는데 대출은 쉽던 시절, 셋집을 구해야 했던 그들은 운이 따르지 않았던 걸까. 대규모로 풀려나온 유동성이 급격히 축소되며 집값이 다시 떨어지니 ‘깡통전세’가 속출했지만 전세보증금이 어떻게 될 리 있겠냐고 여겼을 따름인데, 맙소사, 집주인이 빌라왕이라니, 게다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니, 혼비백산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제도의 틈새에서 서민들 피 빨아먹는 악마들이 탄생했다. 빌라왕 전세사기가 가능했던 것은 2017년 말 민간임대주택 등록 활성화 정책 탓이었다. 서민 임대주택 물량을 민간에서까지 동원해 확보하겠다는 의도였지만, 세금 대폭 감면에 수백채씩 빌라를 사들여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고, 시세가 불분명한 빌라값을 눈속임으로 높여 전세보증금을 끌어올리는 것은 식은 죽 먹기였다. 그런 정부 정책이 예상치 못한 부작용을 낳았고, 지금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다. 그러니 우리 대부분은 그저 운이 좋았을 뿐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김만배도 운이 좋았던 것일까. 막대한 대장동 개발 수익을 그와 일당들이 집어삼킬 수 있었던 건, 때마침 부동산 가격이 급등했기 때문이라지만 도시개발사업 제도 덕분이기도 하다. 개발업자들이 ‘하이 리스크’를 무릅쓰고 ‘하이 리턴’을 노리는 까닭은, 개발이익을 차고 넘치게 차지할 수 있는, 공공성을 외면한 제도의 틈바구니에 있다. 오랫동안 개발을 노려온 외부 토건세력은 원주민 토지 수용을 손쉽고 저렴하게 해치우면서 공공이익은 신경 쓰지 않아도 됐다.
김만배 일당이 벌인 배당수익 잔치판 뒤에는, 수도도 가스도 제대로 들어오지 않는 대장동에서 살다 강제수용당한 이들이 있다. 김만배가 거액의 로비자금을 곳곳에 풀어놓는 동안, 절반 값에 살던 집을 내놓고 갑절이나 비싼 택지를 사야 한다는 제도적 현실을 인정하기 어려운 운 나쁜 원주민들도 있었다. 판검사 출신 전관들이, 기자들이 김만배의 돈을 먹고 마시고 거래할 때, 천정부지로 오른 분양대금을 영혼까지 끌어모아 만들어야 했던 분양 당첨자들은, 과연 운이 좋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감당 못 할 분양가에 빌라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이들을, 빌라왕은 기다리고 있었다. 경기도 성남 대장동과 서울 화곡동, 인천 미추홀구는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나는 운이 좋았던 것이 틀림없다. 대장동은커녕 뉴타운 재개발지역 집이나 땅 따위는 지니고 있지 않았기에 개발사업의 횡포를 견뎌내지 않아도 됐다. 금싸라기 강남 땅은 꿈조차 꾸지 않았기에, 로또 분양을 향한 욕망을 영혼까지 팔아가며 키워내지 않을 수 있었다. 운 좋게 빌라왕에게 볼모로 잡히지도 않았다.
빌라왕과 김만배와 대장동을 열쇳말로 하는 기사를 쓰고 보면서 식은땀 흐르는 기분에 종종 사로잡혔다. 현대 민주주의 국가에서 당연히 보장돼야 할 의식주의 기본권이 운에 좌우되는 판이라니, 보통의 우리는 눈을 가린 채 벼랑 끝을 걸어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허술한 제도의 틈에서 먹이를 기다리는 거미처럼, 꾼들은 지금도 자리잡고 있다. 우리의 삶을 운에 저당 잡혀선 안 된다. 인간이 공동체를 이뤄 살아가는 이유다. 피해자들의 피눈물에 대한 죗값은 이 사회가 치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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