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결] 손자영 | 자립준비청년
#1. 지금은 연락이 끊긴 친구 ○○아, 언젠가 너는 내게 집에 가는 길에 운전을 함부로 하는 사람 때문에 사고를 당할 뻔했다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어. 너를 위로하려고 말을 꺼내려던 찰나, 너는 “진짜 못 배운 고아 새끼도 아니고”라며 그 운전자를 비난했어. 그 말을 듣는데 나는 몸이 얼어붙는 느낌이 들었고 가슴이 쿵쿵 뛰었어. 만약 내가 보육원에서 자랐다는 사실을 알았어도 그런 말을 할 수 있었을까? 몰랐다고 해도 분노를 표현하고 누군가를 욕되게 하는 말로 ‘고아’라는 단어를 쉽게 써도 되는 걸까? 많은 생각이 들었어. 그때 받은 상처를 이야기할까 고민도 됐지만, 그러려면 내가 보육원에서 자랐다고 밝혀야 하고, 그러면 어쩐지 네 말대로 내가 못 배운 사람임을 인정하는 게 될까 봐 결국 말하지는 못했어.
#2. 동네 편의점 사장님, 제가 아르바이트를 시작하고 며칠 뒤 제가 제출한 주민등록등본을 보시다가 왜 가족이 없냐고 물어보셨죠? 거짓말을 하기 싫어서 ‘부모님 안 계신다’고 답한 제게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부모도 없이 혼자 사는 애를 어떻게 믿고 일을 시키나.” 전날까지만 해도 일을 금방 배운다고 좋아하시던 사장님은 바로 다음날 구인공고를 새로 올렸다며 제게 일을 그만두라고 하셨어요. 저는 말없이 일을 그만뒀고, 다음부터는 어떤 일을 구하더라도 가족관계를 솔직하게 말하지 않겠다고 마음먹었어요.
친구나 직장 동료들과 대화 중에도, 범죄 기사 온라인 댓글창에서도 ‘고아’는 ‘믿을 수 없는 사람’, ‘피해를 주는 사람’, ‘극악무도한 잘못을 한 사람’을 지칭하는 욕으로 쓰인다. 진짜 고아들이 지금도 우리 사회 곳곳에서 살아가고 있음에도 남을 욕하는 말로 ‘고아’는 끊임없이 소환된다. 누군가에게 부모가 없다는 것을 온라인 기사 댓글난에 자신의 정의감을 표현하는 수단으로 사용하는 게 진짜 정의일까? 아니다. ‘우리는 너희와 다르다’는 차별, 고아는 그렇게 소비돼도 된다는 지독한 편견이 있을 뿐이다.
내게 그런 말을 했던 사람 중에 실제로 ‘고아’를 만나고 대화해본 사람은 과연 얼마나 될까. 만약 직접 경험해보지 않았다면 이들의 편견은 어디서 온 걸까. 나는 그 이유를 사회적 통념과 미디어에서 찾는다. 드라마나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비치는 고아에 대한 인식과 차별을 현실에서도 비슷하게 경험하기 때문이다.
이는 내가 아름다운재단과 함께 미디어인식개선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영화나 드라마 같은 미디어가 자립준비청년(보호종료아동) 이미지를 부정적으로 소비하는 실태를 조사하고 패러디 일러스트, 토론회 등을 통해 인식 개선을 촉구하며 매체 관계자들과 사회 구성원들이 우리를 있는 그대로의 보통 청년으로 봐주기를 주장하고 있다. 지난 연말에는 ‘미디어 캐릭터 시상식’도 열었다. 자립준비청년의 삶을 편견 없이 다룬 텔레비전·영화 캐릭터 및 작품에 ‘열여덟 어른상’을 시상하며 자립준비청년 인식 개선에 기여한 미디어 관계자 및 제작자들에게 감사를 표하고 당사자들에게 응원의 메시지를 전하기도 했다.
최근 자립준비청년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어떤 도움이 필요하냐는 질문을 자주 받는다. 일각에서는 보육원 퇴소 때 주어지는 자립정착금이나 주거 지원이 강화돼야 한다고 주장한다. 물론 경제적인 부분이나 주거도 중요하지만, 가장 중요한 건 자립준비청년이 자신의 환경을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해도 안전하게 느낄 수 있는 환경이다. 그렇게 된다면 어려운 일이 생겼을 때 숨지 않고 적절한 도움을 받을 수 있고, 더 많은 기회를 만날 수도 있다. 그러면서 건강한 자립에 한발 더 빠르게 다가갈 수 있다.
누군가의 정체성을 왜곡해 남을 비난하는 데 쓰기 전에 내 말에 상처 입는 사람은 없을지, 내가 편견을 퍼트리는 데 일조하고 있는 것은 아닐지 경계해달라고 부탁하고 싶다. 그렇게 천천히 변하는 사회적 인식과 함께 홀로서기에 나서는 자립준비청년들의 어깨에 있는 짐도 서서히 가벼워질 테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