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2월25일 오후 서울 용산구 녹사평역 광장에 마련된 이태원참사 희생자 시민분향소에서 천주교 정의구현전국사제단 소속 신부들이 참사 희생자와 유가족을 위한 성탄대축일 미사를 집전하는 가운데(왼쪽) 보수 단체가 집회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숨&결] 방혜린 | 전 군인권센터 활동가·예비역 대위
전광판에는 ‘이제 그만하세요’라는 빨간색 글자가 계속해서 흘러가고 있었다. 마이크를 잡은 보수단체 여성은 추모미사 중인 유가족과 신부들을 향해 “죽은 사람은 하나님의 소관입니다. 제발 산 사람을 위해 기도하세요!”라고 악다구니를 썼다. 아기 예수가 태어난 이 축복의 날에 왜 죽은 자를 위해 기도하냐고 울며불며 원망했다. 미사를 집전하는 신부의 말소리는 신나는 캐럴 음악 소리에 묻혔다. 12월25일 저녁, 녹사평역에 차려진 ‘10·29 이태원 참사 희생자 시민분향소’에서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주관으로 진행된 성탄대축일 미사 풍경이다.
이태원 상권이 다시 어려움에 직면했다는 기사들을 읽고 크리스마스엔 꼭 이태원에서 외식하고, 이태원 매장에 들러 평소 사고 싶었던 농구화도 사고, 미사에도 참석해야겠다고 다짐했다. 오랜만에 찾은 이태원 풍경은 겨울 그 자체였다. 코로나19 유행이 시작된 뒤에도 사고가 발생했던 골목 뒤편은 늘 시끌벅적했던 기억이 있는데, 무거운 침묵만이 내려앉아 있을 뿐이었다. 항상 줄 서기를 피할 수 없었던 만두 가게도 텅텅 비어 있었다. 동네가 차갑게 얼어붙었다.
사고 현장에 마련된 추모의 벽에서 메시지를 읽고 있는데, 차도에서 “예수천국 불신지옥”이라고 한가득 써 붙인 트럭이 천천히 지나가며 ‘예수만이 당신을 구원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영어로 방송했다. 포스트잇 속 전하지 못한 메시지를 보며 눈시울을 붉힌 동행에게는 어디선가 할머니가 다가와 ‘곧 다 천국 가서 만날 수 있으니 너무 슬퍼하지 말라’며, ‘이것 또한 하나님의 뜻’이라고 성경 말씀이 적힌 종이를 건네려 했다. 얼른 자리를 떴다.
생기를 잃고 적막해진 동네에 하나님 말씀만이 흘러넘쳤다. 그곳에서 사람들은 하나님과 예수의 이름을 빌려 이제 다들 그만하라고, 산 사람은 살아야겠으니 죽은 이를 위해 기도하지 말라고 외쳤다. 동성애자들이 클럽에서 퍼뜨린 코로나19로 인해 이태원이 다 무너졌는데 이번엔 핼러윈이라며, 제발 이제 죽은 이는 떠나보내고 그만하라고 소리쳤다. 성탄대축일은 기쁜 날이니 신나는 노래를 듣자며 반주가 요란한 캐럴을 틀어 재꼈다. “분노할 일에 분노하고 사람의 존엄성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남김없이 울어야 한다”라는 사제단의 목소리는 눈을 감고 집중해야 간신히 들릴 수준으로 묻혔다. 바로 옆에서 자신 또한 천주교 신자라며 우리는 오늘 기쁨의 노래를 불러야겠다고 악에 받쳐 외치는 와중에, 미사에 참석한 유가족과 시민은 다만 고요하게 슬퍼했다.
세월호와 이태원이 공유하는 지점 중 핵심은 ‘놀러 가다’에 있다. 놀러 가는 사람은 죽음을 예상하지 않는다. 그건 마치 동네 산책길에도 죽음을 각오해야 하는 것만큼 비정상이다. 죽으러 나간 게 아닌데 죽어서 온 사람이 수백명이나 되는 사건은 오랫동안 기억돼야 한다. 오래 애도하면서 그 죽음의 원인에 가닿을 수 있어야 한다. 남아 있는 산 사람은 안전하게 살아야 하니까. 죽은 이들을 위한 기도와 살아남은 이들을 위한 기도는 별개가 아니다.
성탄절 이후 내내 “그만”이라는 두 글자의 폭력을 생각하게 된다. 사건이 일어난 지 100일도 채 지나지 않았다. 158명의 삶을 하루에 하나씩 짚어본다 치더라도 4월은 돼야 한다. 그러니 산 사람은 살아야겠으니 그만하라는 말이 어찌 폭력이 아닐 수 있을까. 무엇을 그만해야 하나? 우린 아직 한 사람분의 슬픔과 애도와 분노의 시간조차 온전히 보내지 못했는데, 감히 죽은 이를 애도하길 그만하라는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이는 하나님도, 예수님도, 보수단체도 될 수 없다.
“진심으로 통곡할 줄 아는 양심이라야 복음이 주는 기쁨을 빼앗기지 않는다.”
스피커를 통해 쩌렁쩌렁 울려 퍼지는 예수천국 불신지옥이 세상을 구원하는 게 아니라, 가장 낮은 곳으로 임할 수 있는 양심이 모여 세상을 구원하기 마련이다. 새해에도 그만하라는 말의 폭력 앞에 굴하지 않고 계속 분노하고, 슬퍼하고, 애도할 수 있는 우리가 될 수 있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