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13일 윤석열 대통령과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가 캄보디아 프놈펜에서 한·미·일 정상회담을 하고 있다. 프놈펜/윤운식 선임기자yws@hani.co.kr
박민희 | 논설위원
세계사의 전환점으로 기록될 2022년이 저물고 있다. 2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시작된 격동은 8월 낸시 펠로시 미국 하원의장의 대만 방문에 반발한 중국의 대만 봉쇄 훈련, 9월 북한의 핵무력 법제화와 한국을 겨냥한 전술핵 위협을 거쳐 12월 일본의 ‘반격 능력’(적기지 공격 능력) 보유와 군비 강화로 이어졌다.
77년간 유지되어온 평화헌법의 핵심을 흔드는 일본의 안보전략 변화에 대해, 일본의 침략과 식민지배를 겪은 한국은 경계감을 가질 수밖에 없다. 한반도에 분쟁이 벌어지는 경우라도 일본이 한국의 동의 없이 북한에 군사력을 행사하는 것은 안된다는 원칙을 지속적으로 명확히 밝힐 필요가 있다. 일본의 내년 방위비는 올해보다 26% 늘어난 66조원으로 편성되었는데, 일본과 중국의 군비경쟁이 격화되면서 동북아 안보 정세가 더욱 위태로워질 위험도 직시하고 대응해야 한다.
일본의 재무장은 한반도에 대한 영향력 강화와 재도약을 꿈꾸는 일본 극우파 노선의 연장선에 있다. 하지만 중국이 대만 무력 통일을 준비하고 북한이 핵 선제공격을 위협하는 현실에서, 방어력을 강화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는 일본 시민들의 판단도 분명 반영되어 있다. 이 부분은 한국도 공유하는 고민이다. 한반도 주변에서 20세기 초 제국주의 ‘열강 대결’과 한국전쟁 전야의 ‘냉전 대결’과 비슷한 구도가 다시 나타나고 북핵 문제까지 뒤엉키면서 매우 위험한 정세가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일본의 군국주의를 경계하면서도, 동아시아에서 전쟁을 막을 억지력을 만들어 평화를 지켜야 한다는 원칙 위에서 한일이 필요한 협력을 진전시켜나가야 한다.
한국 사회의 관점은 극과 극으로 갈라져 있다. 윤석열 정부와 보수세력은 ‘역사 문제는 어서 덮고, 안보·경제 협력만 하면 된다’는 속도전을 벌이고 있다. 진보 진영은 일본 우경화의 위험을 강조하면서 ‘죽창가’를 잊지 말자고 강조해왔다. 시민들의 여론은 어떨까. 최근 <시사인>(12월20일치)과 한국리서치가 공동으로 조사한 ‘2022년 한국인의 대일본 인식’을 보면, 응답자의 71.9%가 “양국 간 과거사 문제가 해결되기 이전이라도 한-일 관계 개선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답했다. 한편으론 76.5%가 “양국간 과거사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한-일 관계의 실질적 개선은 이뤄지기 어렵다”고 했다. 협력하되 과거사는 지속적으로 해결해야 한다는 ‘투트랙’ 해법을 지지하는 인식이 분명하다.
국가인권위원회의 ‘대한민국 인권상’ 수상자로 결정되었지만 외교부의 제동으로 서훈이 보류된 양금덕 할머니에게 지난 11일 시민단체가 자발적으로 만든 인권상을 수여하고 있다. 광주/연합뉴스
이런 해법은 이미 만들어져 있다. 1998년 김대중-오부치 선언(21세기 새로운 한·일 파트너십 공동선언)에서 당시 오부치 게이조 일본 총리는 일본의 식민지배에 대해 “통절한 반성과 마음으로부터 사죄”를 밝혔고, 김대중 대통령은 “이러한 일본의 역사인식을 평가하고, 화해와 선린우호협력에 입각한 미래지향적인 관계를 발전시켜야 한다”고 했다. 이 공동선언을 한-일 관계에 국한하지 말고 세계사적 관점에서 볼 필요가 있다고 정치학자인 강동국 나고야대 교수는 제안한다. 식민지배의 역사는 아직 완전히 해결되지 못했다. 독일도 유대인 강제수용소와 학살, 유럽 국가들에 대한 침략에 대해서는 진심어린 사죄를 해왔지만, 나미비아 등 아프리카 국가에 대한 식민지배에 대해서는 제대로 사과하지 않았다. 하지만 역사는 지워질 수 없다. 아프리카 등에서 식민지배를 겪은 국가들이 분명하게 사과를 요구하고 있고, 유럽 국가들의 뒤늦은 사과와 배상이 조금씩 시작되고 있다. 이런 점에서 보면 “김대중-오부치 선언은 세계사에서 가장 앞서서 제국주의와 식민지배에 대한 반성의 사례를 만들어낸 것이고, 한일이 지속적으로 그 성과를 진전시켜 세계의 ‘공공재’로 발신함으로써 지구사적 과제의 해결을 선도할 가능성을 제시해야 한다”고 강 교수는 말한다. 그런 방향 위에서 한국이 목표와 원칙을 분명히 하고 실현해 나가려는 지속적인 노력이 중요하다. 한일의 국력 격차가 줄어든 현실을 기반으로 평등한 협력을 해야 하고, 양국 시민사회의 연대와 이해를 넓혀가면서 역사 문제를 해결하고 일본 우경화를 견제하며, 북한과 중국의 태도를 바꿀 평화의 지렛대로 활용할 방안을 두루 고려해야 한다.
지금 윤석열 정부의 대일 외교는 단순하고 조급하다. 강제동원 피해자 인권 회복 운동의 상징인 양금덕 할머니의 인권상 서훈을 보류하는 등 피해자들을 외면하고 한국 기업의 기부로 모은 돈을 일본 가해 기업 대신 지급하면 끝이라는 태도로 밀어붙이고 있다. 역사는 이렇게 덮어버리고 내년 초 윤 대통령이 일본을 방문해 관계 개선을 서두르겠다는 계산인데, 심각한 오판이다. 이런 잘못된 속도전은 여론의 강한 반발을 일으켜 한-일 관계를 더욱 깊은 수렁에 빠뜨리게 될 것이다. 윤 대통령은 우선 새해 첫 일정으로 양금덕 할머니를 직접 만나 인권상을 드리고 수십년 동안 일본의 사과를 요구해온 피해자들의 사연에 귀 기울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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