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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서로 ‘누칼협’ 날리는 세상, 그래서 더 기적 같은 따스함

등록 2022-12-26 18:27수정 2022-12-27 00:56

광주·전남 지역에 폭설경보가 발효된 지난 23일 광주시 서구 죽봉대로에서 시민들이 눈길을 빠져나가지 못하고 있는 차량을 밀고 있다. 연합뉴스
광주·전남 지역에 폭설경보가 발효된 지난 23일 광주시 서구 죽봉대로에서 시민들이 눈길을 빠져나가지 못하고 있는 차량을 밀고 있다. 연합뉴스

[편집국에서] 정유경 | 디지털뉴스부장

코로나19에 따른 ‘집합금지’ 없이 보낸 성탄 전야, 3년 만에 절친들이 모였다. 외국 사는 친구까지 값비싼 비행기표를 사서 왔다. 정작 남쪽에 사는 친구가 폭설로 비행기가 뜨지 못해 서울로 못 올 뻔했다. 무릎까지 푹푹 빠지는 눈을 헤치고 기차에 올라탄 친구가 “딴 세상인 듯하다”며 눈 사진을 보냈다. 2005년 12월 이후 17년 만의 최대 폭설이었다는 호남 풍경이 실감 났다. 강수량으로 치면 광주가 22~24일 사흘간 13.9㎜ 정도로 가뭄 해소에도 역부족이었다는데, 눈으로 쌓이니 무려 40㎝. 전북 순창엔 67㎝까지 눈이 쌓였다. 농촌에선 비닐하우스와 축사 붕괴 신고가 속출했지만, 복구를 도울 손길마저 닿기 어려웠다.

마치 산타처럼, 강원도 제설차가 무려 500㎞ 거리를 달려와 전북지역 제설작업을 도왔다는 소식이 주말 동안 <한겨레> 등 뉴스 채널에서 널리 읽혔다. 사진에 찍힌 건 차량 가격이 4억원에 육박한다는 메르세데스벤츠사의 거대한 ‘유니목’ 제설차다. 강한 출력을 바탕으로 험난한 지형의 산간지방에 쌓인 수십톤의 눈을 밀어내고 길을 뚫어 다른 제설차량을 인도하는 용도로 요긴하게 쓰인다. 마침 강원도엔 큰 눈 예보가 없어, 전북도로부터 23일 지원 요청을 받자 곧바로 유니목 3대를 포함한 제설차 7대와 인력 15명을 파견할 수 있었단다. ‘호남지역 폭설 제설작업 지원 차량’이라는 펼침막을 걸고 강원 도로관리사업소에서 파견한 제설 트럭들이 고속도로를 달리는 모습을 찍어 공유한 누리꾼들은 “제설 끝판왕 강원도에서 전주 제설 도와주러 왔다고 함” “전주 제설 도와주러 왔다는데 옵티머스 프라임 같음”이라며 반가워했다. 2019년 강원 고성~속초 산불이 났을 때 가장 거리가 먼 전남 해남을 포함해 전국의 소방차들이 줄지어 도로를 달렸던 광경을 다시 떠올린 누리꾼도 있었다.

한국, 일본은 물론 미국 북부에 이르기까지 지구 북반구가 일제히 ‘북극 한파’로 얼어붙었지만, 외투 속 깊이 품은 붕어빵만큼 따뜻한 이야기들은 여전히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뉴욕 타임스>가 전한 관광객들의 이야기도 그렇다. 23일 오후 2시께, 미국 뉴욕주 서부를 강타한 눈폭풍을 만난 한국인 관광객들이 차가 배수로 눈 도랑에 빠지자 제설 삽을 빌리려 인근 한 주택의 문을 두드렸다. 집주인인 캄파냐씨 부부는 삽을 빌려주는 대신, 관광객들을 집 안으로 들였다. 마침 이 부부는 한국 음식을 좋아해, 집에 전기밥솥은 물론 김치, 고추장, 참기름까지 구비하고 있었단다. 한국 손님들이 손을 더해 뚝딱 차려 낸 제육볶음과 닭볶음탕은 근사한 크리스마스이브 만찬이 됐다.

재난은 주어진 일상이 당연하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을 새삼 일깨운다. 폭설 와중에 직장인 커뮤니티인 ‘블라인드’엔 ‘출근해야 하는데 전북 전주시의 제설이 잘 이뤄지지 않는다, 공무원들의 직무유기’라고 비판하는 글이 올라왔다. 그러자 “누가 출근하라고 칼 들고 협박함?” “누가 제설 안 된 도로로 가라고 칼 들고 협박함?” 같은 댓글이 달리기 시작했다. 지난 8월 공무원들의 저임금 개선 요구를 두고 이 커뮤니티 이용자 일부가 이른바 ‘누칼협’(누가 공무원 하라고 칼 들고 협박했나) 운운하며 일축했던 것을 반대로 비꼰 것이다.

“공무원은 아니지만 새벽에 제설 차출되어도 초과근무수당 없는 것 안다. 세금 타령 하려면 수당 정도는 줘라.” “180(만원) 줄 때는 딱 그 정도만 일하니까 그렇게 받는 거라며? ‘누칼협’ 외치면 결국 그 피해는 니들에게 돌아간다.” 다른 댓글들도 역지사지로 공무원들을 거들었다.

어떤 문제를 개선해야 한다고 외치는 사람들에게 ‘누칼협’으로 응수하는 세상엔 희망이 없다. ‘그러게 누가 공무원 하랬나’라는 비아냥과 조롱은 ‘그러면 이 정도 공공서비스에 만족하라’는 냉소와 비난으로 되돌아올 뿐. “누가 칼 들고 이태원 가라고 협박함?” “화물 운송으로 돈 벌기 힘들면 다른 일을 하면 되지 않나? 누칼협?” 칼날 같은 댓글들이 사람들을 찌르는 것을 지켜볼 때면 전주로 달려간 강원도 제설차를, 이방인들에게 삽을 빌려주는 대신 밥솥을 열어 환대해준 미국인 부부를 생각한다. 재난을 헤치고 돌아온 가족과 친구의 손을 잡기까지, 그를 안전하게 떠받쳤을 수많은 손을 떠올린다.

ed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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