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1일(현지시각) 가상자산 거래소 에프티엑스(FTX) 창업자 샘 뱅크먼프리드(오른쪽 둘째)가 바하마 린던 핀들링 국제공항에서 미국으로 송환되는 비행기로 걸어가고 있다. 나소/로이터 연합뉴스
[뉴노멀-헬로, 블록체인] 김기만 | <코인데스크 코리아> 부편집장
올 한해 가상자산(암호화폐) 업계는 악재의 연속이었다. 지난 5월 테라·루나 폭락 사태는 헤지펀드와 대출업체 등 관련 업계의 줄도산으로 이어졌고, 지난달 세계 3대 가상자산 거래소인 에프티엑스(FTX) 파산 여파는 현재진행형이다. 세계 최대 가상자산 거래소로 꼽히는 바이낸스마저도 안정성을 의심받고 있는 형국이다. ‘대마불사’도 가상자산 업계에서는 통하지 않는 듯하다.
대마불사는 바둑에서 유래된 용어다. ‘많은 돌이 모여 있는 대마가 잡히면 패배하는 것이나 다름없기에 기사가 혼신의 힘을 다해 살리기에 나서 대마는 쉽게 잡히지 않는다’는 뜻이다. 경제 분야에선 거대 기업이나 금융기관은 위기가 닥치더라도 만약 도산하면 수많은 경제주체가 피해를 보기 때문에 정부가 나서서 구제할 수밖에 없다는 의미로 자주 인용된다.
에프티엑스 파산은 업계에서 올해 가장 큰 사건 중 하나로 꼽힌다. 샘 뱅크먼프리드 전 에프티엑스 최고경영자(CEO)는 한때 ‘코인계의 제이피(JP)모건’으로 불렸다. 블록파이, 보이저디지털 등 위기에 빠진 기업들 인수를 추진하면서 구세주 역할을 자처했기 때문이다. 미국 중앙은행이 없던 대공황 시기 금융시장을 살렸다는 평가를 받는 미 금융업계의 대부 존 피어폰트 모건처럼 말이다.
파산 전 에프티엑스의 성장세는 말 그대로 파죽지세였다. 2019년 설립 이후 3년 만에 세계 3위 거래소로 성장했다. 미국 프로농구(NBA) 히트의 홈구장 이름을 사들여 ‘에프티엑스 아레나’로 바꾸고, 약 100억원에 이르는 미국프로풋볼(NFL) 결승전 슈퍼볼 광고도 사들였다. 스테픈 커리와 톰 브래디 등 유명 스포츠 선수들이 광고 모델로 발탁됐다. 에프티엑스의 기업가치는 한때 320억달러(약 42조원)에 달했다.
그러나 화려함 뒤에 숨겨진 치부는 충격적이었다. 에프티엑스 파산 신청 뒤 새 최고경영자가 된 존 레이 3세는 “40년 동안 구조조정을 경험해왔지만 이렇게 기업통제가 완전히 실패하고 신뢰할 수 있는 재무정보가 전혀 없는 곳은 처음”이라고 말할 정도였다. 특히 앨러미다 리서치의 자금 조달을 위해 고객예치금을 유용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투자자들의 배신감은 더욱 컸다.
샘 뱅크먼프리드는 지난 12일 바하마에서 체포됐다. 미국 검찰은 사기와 자금세탁 등 8개 혐의로 그를 기소했다. 법원이 모든 혐의를 인정하면 최대 115년 징역형까지 받을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
한때 업계 최고 스타였던 샘 뱅크먼프리드의 쓸쓸한 몰락은, 올해 상반기 업계를 떠들썩하게 했던 테라의 성공가도와 몰락의 중심에 있던 권도형 테라폼랩스 대표를 떠올리게 한다. 올해 초 테라가 이더리움에 이어 두번째로 큰 탈중앙화금융(디파이) 플랫폼으로 떠오르자, 세계 주요 언론은 그를 세계 가상자산 시장의 거물로 주목했다.
당시에도 거대한 규모의 ‘폰지 사기’(다단계 금융 사기)라는 비판의 목소리는 있었지만, 테라(UST)가 1달러를 유지하지 못하고 무너지기 전까진 경고가 투자자들에게 제대로 전달되지 못했다. 시가총액 10위권이었던 루나(LUNA) 가격이 99.9% 하락하는 데 일주일도 걸리지 않았다. 권 대표는 현재 검찰 체포를 피해 해외를 전전하며 도망 다니는 신세로 전락했다.
가상자산 시장은 아직 제도권에 제대로 편입되지 못했다. 세계적으로 법과 제도가 미비한 상태다. 업계가 위기에 빠지더라도 구제에 나설 정부도 없다. 모든 것이 투자자의 책임인 시장이다. 대마불사의 논리가 통하지 않는 게 당연할지 모른다.
겉으로 보기에 크고 화려하다는 사실이 안전을 담보하진 못한다. ‘이렇게 큰 회사(프로젝트)가 망하겠어?’라는 생각은 막대한 금전적 피해로 돌아올 뿐이다. 투자자들의 옥석 가리기가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한 시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