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로런스 리버모어 국립연구소 국립점화시설 연구팀은 최근 레이저 핵융합 장치로 투입된 에너지보다 더 많은 에너지를 만들어내는 데 성공해 핵융합발전 실현에 한걸음 더 다가갔다. 제이슨 로리아(Jason Laurea), 로런스 리버모어 국립연구소 제공
강석기 | 과학칼럼니스트
김동인의 단편 ‘무지개’는 헛된 꿈을 좇다 삶을 낭비하는 인간의 어리석음을 그리고 있다. 무지개를 바라보다 한나절만 걸으면 잡을 수 있을 것 같아 집을 나선 소년은 늘 그만큼 떨어져 유혹하는 무지개를 평생 쫓아다니다 포기한 순간 노인이 돼 있더라는 비극적 결말을 담고 있다.
과학에서 무지개에 해당하는 대표적인 분야가 핵융합발전 아닐까. 필자는 최근까지도 핵융합발전이 “30년 뒤에는 성공해 인류가 에너지 걱정에서 해방될 것”이라는 식의 얘기를 들어왔던 것 같다. 태양 내부에서 일어나는 일을 재현한다는 핵융합발전은 정말 헛된 꿈에 지나지 않는 걸까.
지난주 미국 에너지부는 로런스 리버모어 국립연구소의 국립점화시설 연구팀이 처음으로 핵융합반응으로 투입된 에너지보다 1.5배 많은 에너지를 만들어내는 데 성공했다는 실험 결과를 발표해 세상을 깜짝 놀라게 했다.
연구자들은 고출력 레이저 장치 192대를 콩알만한 크기의 표적에 쏘아 순간적으로 1억도가 넘는 고온을 만들었다. 표적에 들어 있는 수소의 동위원소인 중수소(D)와 삼중수소(T)는 원자핵과 전자가 분리되는 플라스마 상태로 바뀐 뒤 원자핵 사이에 융합이 일어나 헬륨핵과 중성자로 바뀌며 에너지를 내놓는다. 들어간 것보다 더 많은 에너지가 나왔다고는 하나 일회성이라, 안정적인 반응이 지속돼야 가능한 핵융합발전 상용화까지는 아직 갈 길이 멀지만 큰 진전인 것만은 분명하다.
흥미롭게도 국립점화시설의 레이저 핵융합 장치는 핵융합발전이 아니라 핵무기 개발을 위한 설비다. 옛 소련 몰락으로 냉전이 끝나고 1992년부터 지하 핵실험이 금지되자 미국은 이를 대신할 수 있는 방법을 찾다 1997년 점화시설을 짓기 시작했다. 핵무기가 폭발할 때 내부 상황을 재현한 데이터를 분석해 최적의 무기를 설계하는 게 궁극적인 목표였다. 2012년 실험 성공을 목표로 했지만 공사가 늦어져 2009년에야 완공됐고 그 뒤 13년 실험 끝에 계획보다 10년 늦은 올해 성공했다. 이 기술을 핵융합발전으로 확장할지는 아직 미지수다.
그런데 꼭 로런스 리버모어 국립연구소가 아니라도 핵융합 상용화를 연구하는 곳은 많다. 오늘날 북미와 유럽을 중심으로 30여개 기업이 다양한 형태의 핵융합 장치를 개발하고 있는데 투자자금이 3조원을 넘는다. 이 가운데 몇곳은 실증 설비를 짓고 있으며 수년 안에 완공해 실험에 들어가고 2030년대에는 상용화한다는 도전적인 목표(투자자를 위한 립서비스?)를 내놓았다.
그런데 핵융합 하면 떠오르는 국제핵융합실험로(ITER)는 어떻게 된 걸까. 우리나라를 포함해 35개국이 참여하고 총예산이 거의 30조원에 이르는 세계 최대 과학 프로젝트임에도 엉뚱한 곳에 최초 성공의 영예를 빼앗겼으니 말이다. 1988년 출범한 국제핵융합실험로는 우여곡절 끝에 2013년 프랑스 카다라슈에 토카막(플라스마를 가두는 도넛 모양의 장치)을 짓기 시작해 2025년 완공을 목표로 하고 있다. 예비 실험이 성공적으로 진행된다면 2035년부터 발전 가능성 검증에 들어갈 것이다.
토카막이건, 기업들이 추진하는 다른 유형이건 핵융합발전 상용화에 성공해 세계 곳곳에서 발전소가 지어지기 시작하면 30년 뒤에는 핵융합이 에너지 생산에 본격적으로 참여할 것이고, 세기말에는 정말 인류가 에너지 걱정에서 해방될지도 모른다.
지난 5월14일 베르나르 비고 국제핵융합실험로 사무총장이 사무실에서 72살로 숨졌다. 2015년 부임해 지지부진하던 프로젝트를 정상 궤도에 끌어올린 비고는 40년 넘는 경력을 핵분열과 핵융합발전 연구에 헌신했다. 소설에서 무지개를 좇던 소년의 허무한 종말과는 달리 핵융합 에너지 시대를 꿈꾼 비고의 비전이 실현될 날이 아주 멀지는 않은 것 같다. 다음은 비고가 남긴 말이다.
“우리는 자연을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인간의 한계 내에서 자연이 우리에게 보여준 것을 재현하려고 노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