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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시선이라는 선물

등록 2022-12-15 19:19수정 2022-12-15 19:39

서민원이라고도 불리는 영국의 하원 회의장. 위키미디어 코먼스
서민원이라고도 불리는 영국의 하원 회의장. 위키미디어 코먼스

[크리틱] 임우진 | 프랑스 국립 건축가·<보이지 않는 도시> 저자

생업은 건축가이지만 가끔 글도 쓰고 하다 보니 한 번씩 남들 앞에 나서서 말을 해야 하는 경우도 있다. 11월 초, 한 방송사가 주최한 ‘다시 쓰는 민주주의’라는 주제의 포럼에 초청받아 다국적 정치학자들 사이에서 건축가가 생각하는 민주주의의 의미에 대해 발표한 적이 있다. 우리 국회 회의장과 거대 도시 속의 고질적인 불통 문제에 대해 강연하던 중 사회자로부터 지금 우리 의사당의 가장 큰 문제가 뭐냐는 질문을 받았다. 나의 답변은 우리 국회의원들이 너무 넓고 산만한 공간에 고립되고 속박당해 있다였다. 주변 사람에게도, 단상의 발표자로부터도 멀어져 있으니 멍하니 허공만 보거나, 졸거나, 결석하거나, 그것도 아니면 고함만 지르는 극단적 행동을 자주 보인다는 것이다. 태만하거나 그것도 아니면 툭하면 싸우는 얄미운 국회의원들에게, 그들 잘못이라기보다는 공간 문제 때문이라는 ‘면죄부’를 줄 필요가 있냐는 노파심이 들 수도 있다. 하지만 공간 구조에 따라 인간의 소통이 너무나 많은 영향을 받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어쩌면 사람 그 자체의 문제보다도.

몇 년 전, 인기를 끌었던 티브이 프로그램 <나는 가수다> 무대에 섰던 가수들은, 노래와 안무 하나하나에 집중할 준비가 된, 소통하기로 ‘작정’한 관객을 마주했을 때 없는 힘까지 쥐어짜 노래해야 했다. 평가해야 하는 임무가 주어졌기에 역으로 공연이 좋으면 환호할 준비도 되어있었던 관중들과 그들의 반짝이는 시선이 가수에는 어떻게 다가왔을까. 그것은 소통하려는 의지와 다른 말이 아니다. 타인의 시선이 체감될 때 사람의 감각은 활성화된다.

대부분 강당이나 회의장은 한쪽은 단상이 놓인 무대, 반대쪽은 객석 같은 한 방향으로 구성된다. <나는 가수다>의 관객처럼 소통하려는 동기부여가 되지 않은 채 참석했다면, 이런 경우 객석의 관객은 여지없이 수동적 위치에 처한다. 일전에 군 지휘관들 앞에서 교양 강좌를 했던 한 강연자가, 매번 수천 명의 부대원 앞에 서는 장성들도 객석에 앉게 되자 그들 역시 조는 걸 보고, 교육이란 건 누구에게나 힘든 거란 걸 실감했다고 했다. 그럴 때 내가 권하는 건축적 비책이 있다. 바로 무대 위 단상을 치워 발표자의 전신이 노출되게 하고, 거기에 더해 강연자 뒤편에 2~3줄이라도 관객을 앉히는 것이다. 그러면 관객끼리 서로 마주 보게 되고 발표자는 관객 사이에 끼는 상황이 된다. 단지 자신을 바라보는 다른 이의 시선이 더해진 것뿐인데 졸거나 딴짓하는 사람은 놀라울 정도로 줄어든다.

서민원이라고도 불리는 영국의 하원은 우리보다 2배 많은 의원이 우리보다 3배나 좁은 회의장에 밀집해 앉아있다. 그것도 절반씩 나눠 서로 마주 보고 있으며, 단상은 객석 가운데 위치한다. 발표자는 양쪽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관객을 앞뒤로 마주해야 하는 구조이며, 객석에 앉아있는 의원조차 반대편에 앉아있는 다른 의원을 마주 봐야 하는 구조이다. 또한, 바로 옆 의원과도 서로 붙어 앉아있으니 쉽게 귓속말을 주고받고 수시로 의견을 교환한다. 거기다 회의장 상부에는 단상과 의원석을 함께 내려 보는 일반 관람석이 있다. 결과적으로 회의장 전체가 또 다른 관객의 시선의 과녁이 된 일종의 ‘무대’가 된 것이다. 서로의 시선은 가까울 뿐 아니라 서로 교차하고 얽혀있다. 여기서 졸거나 딴짓할 바보는 없다.

내게 국회의사당 공간 문제를 물었던 포럼의 사회자가 건축적으로 가장 민주적인 공간과 도시의 모습이 뭐냐 물었다면, 나는 많은 시선이 여러 방향에서 평등한 방법으로 교차하는 곳이라고 답했을 것이다. 교차하는 다양한 시선 속에 처하게 된 사람들은 고립되지 않는다. 바로 이것이 공간의 힘이다. 넓고 휑한 의사당에서 외로이 고립된 (혹은 숨어버린) 의원들에게 우리 시민의 시선이라는 선물을 아끼지 말아야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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