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이 13일 용산 대통령실에서 국무회의를 주재하고 있다. 대통령실사진기자단
[편집국에서] 황준범 | 정치부장
취임 7개월 만에 ‘역사와의 대화’를 시작한 걸까. 윤석열 대통령의 입에서 자유, 연대, 법치, 헌법이 자주 나온다. 대통령이 추구하고 수호해야 할 가치들인 건 맞다. 문제는 윤 대통령이 쓸 때 이 단어들은 대체로 적대와 편 가르기, 불관용, 배제로 이어진다는 점이다.
지난 13일 국무회의 마무리 발언은 섬뜩하기까지 하다. 윤 대통령은 “자유를 제거하려는 사람들, 거짓 선동과 협박을 일삼는 세력과는 함께할 수 없다”며 “이는 헌법을 수호해야 하는 대통령의 책무”라고 말했다. 또 “자유민주주의를 지키려면 진실을 중시해야 한다. 선동가가 아닌 전문가에게 국정을 맡기는 것도 이 때문”이라고 했다. ‘거짓 선동과 협박을 일삼는 세력’이 대한민국을 전복할 뻔했나?
화물연대의 파업에 “불법과 타협 없다”며 엄정 대응 기조로 일관해 15일 만에 ‘백기 투항’을 얻어낸 경험에 윤 대통령은 잔뜩 고무된 듯하다. 국정수행 지지도는 올랐고, 보수 진영은 찬사를 보낸다. 화물연대 제압으로 얻은 자신감이 국정운영 전반에 강경몰이로 이어질 것이라는 세간의 관측은 틀리지 않아 보인다. 윤 대통령은 “자유를 지키고 법치를 확립하는 것은 사회질서 유지뿐 아니라 안보, 경제, 과학, 교육, 사회, 문화 등 모든 면에서 반드시 지켜야 하는 국정의 최고 가치”라고 말했다.
화물 운송기사들의 과속·과적·과로에 대한 해법 마련에 정부·여당이 손 놓고 있다가 6개월 만에 다시 시작된 운송거부였다. 여기에 초장부터 ‘불법’ 딱지를 붙이고 몰아붙여 파업 철회를 끌어냈으면 이제는 ‘국회의 논의에 맡기겠다’고 나올 법도 한데, 윤 대통령은 “파업 기간 발생한 불법행위에 끝까지 책임을 물어야 할 것”이라며 숨통을 틀어쥔 손을 풀지 않고 있다.
비판 세력은 절멸할 듯 배격하면서, 자신이 원하는 것은 다 지키고 얻으려는 윤 대통령의 통치 스타일은 이제 낯설지 않다. 상명하복과 직진이 몸에 밴 검찰총장 출신의 윤 대통령에게 대화와 타협 같은 정치 문법이 낯설 뿐이다. ‘국익’과 ‘헌법 수호’를 이유로 비판 언론을 대통령 전용기 탑승에서 배제하는 행위는 정작 세계인의 눈에는 ‘국격 훼손’으로 비친다는 점은 윤 대통령에게 큰 고려 사항이 못 된다. 이태원 참사와 관련해 국민 다수는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의 정치적·도의적 책임을 묻고 있지만, 윤 대통령은 ‘진상 조사 먼저’라며 법의 잣대를 앞세워 못 들은 척하고 있다. 국회를 통과한 이 장관 해임 건의를 ‘무시’로써 거부하는 태도는 유족과 야당, 국민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그러면서 윤 대통령은 내년도 예산안은 빨리 통과시켜달라고 한다. 윤 대통령은 지난 12일 “민생 앞에 여야가 따로 없는 만큼 초당적 협력과 조속한 처리를 간곡하게 당부한다”고 말했다. 앞에 앉은 이는 야당이 아니라 국무총리였다. 연말 국회에 야당의 협조가 절실하지만, 윤 대통령의 빈번한 관저 만찬에 야당 자리는 없다. 오히려 윤 대통령은 예산안 처리의 최대 쟁점인 법인세 인하를 “이번에 반드시 처리돼야 한다”고 밝혀, 여야 협상을 더 어렵게 만들었다. 윤 대통령이 여당 지도부에 협상 재량권은 주지 않으면서 요구사항 관철만 닦달한다는 평이 여권 안에서부터 나온다. 국회를 거쳐야 하는 노동·연금·교육 개혁도 이런 식으로 해낼 수 있다고 생각하는지 궁금하다.
대통령이 ‘역사와의 대화’를 시작하는 때가 가장 위험한 순간이라는 말은 정치권에 오래도록 전해지는 격언이다. 대통령이 독선에 빠져든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윤 대통령이 그 단계라고 단정하고 싶진 않다. 하지만 자유·연대·법치·헌법을 포용의 그물망이 아닌 배제의 분할선으로 삼으려는 윤 대통령의 인식이 강해지고 있다는 점은 분명해 보인다. 숱한 논란과 불편을 감수하고 ‘용산 집무실’ 시대를 연 것은 탈권위, 개방, 소통의 대통령이 되겠다는 명분 아니었나? 그 연장선에서 타협과 공존을 위한 양보와 포용의 결단은 윤 대통령에게 기대하기 어려운 걸까. 1년4개월 뒤의 총선 승리만 바라보며, 그때까진 이렇게 앞장서서 갈라치고, 공권력으로 으르고, ‘다 얻겠다’고 외치기만 하려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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