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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행안부 ‘검열 태클’에 노래는 더 멀리 갔다…‘늑대가 나타났다’

등록 2022-12-11 18:39수정 2022-12-11 23:19

행안부 입김에 부마민주항쟁 기념식 공연곡 교체 요구
가수 이랑, 검열 반발 공연무산…되레 노래 관심 높아져
가수 이랑의 ‘늑대가 나타났다’ 라이브 영상. 유튜브 갈무리
가수 이랑의 ‘늑대가 나타났다’ 라이브 영상. 유튜브 갈무리

[한겨레 프리즘] 서정민 | 문화팀장

고등학생이 그렸다는 카툰 <윤석열차>가 온라인에서 화제가 됐을 때, 킥킥대며 봤다. 지난여름 전국학생만화공모전 카툰부문 금상(경기도지사상)을 받은 작품으로, 9월30일~10월3일 부천국제만화축제에서 전시됐다고 했다. 전시도 끝났겠다, 그냥 뒀으면 적당히 회자하다 말았을 것이다.

그런데 문화체육관광부가 소매를 걷어붙이고 나서면서 일이 커졌다. 부천국제만화축제 폐막 다음날인 10월4일, 해당 작품을 선정·전시한 한국만화영상진흥원에 엄중 경고하고 관련 조처를 하겠다고 밝힌 것이다. 곧바로 ‘표현의 자유 억압 논란’ 기사가 쏟아지면서 온 국민이 <윤석열차>를 보게 됐다. 그림 속 깨알 디테일과 날카로운 풍자를 치켜세우는 반응이 넘쳐났다. 속으로 생각했다. ‘문체부는 왜 완장 차고 나서서 긁어 부스럼을 만드는 우를 범했을까?’

부천국제만화축제 전국학생만화공모전 금상 수상작 &lt;윤석열차&gt;. 온라인 커뮤니티 갈무리
부천국제만화축제 전국학생만화공모전 금상 수상작 <윤석열차>. 온라인 커뮤니티 갈무리

내 생각이 짧았다. 비난 여론을 무릅쓰고 과도한 리액션을 취한 데는 나름의 계산이 깔려 있었다. 당장 10월21~25일 부천국제애니메이션페스티벌의 딸림 행사로 열린 ‘국제애니메이터&만화가 초청전’에 출품한 만화 50여점 가운데 딱 한 작품만 돌연 전시가 불허되는 사태가 벌어졌다. 가로막힌 출품작은 오창식 작가의 <멤버 유지>(member yuji). 윤석열 대통령 부부에 대한 풍자를 담은 만화였다. 부천국제애니메이션페스티벌은 문체부로부터 국고보조금 1억2천만원을 지원받는 행사다. 돈줄을 쥔 문체부의 엄포가 즉시 효력을 발휘한 것이다. 이를 보고 누군가는 씨익 웃었을 테다.

풍자 카툰 &lt;멤버 유지&gt;(member yuji). 오창식 작가 제공
풍자 카툰 <멤버 유지>(member yuji). 오창식 작가 제공

이뿐만이 아니다. 행정안전부가 10월16일 부마민주항쟁 43돌 기념식에서 공연될 예정이던 가수 이랑의 노래 ‘늑대가 나타났다’를 문제 삼고 나섰다는 의혹이 불거졌다. 부마민주항쟁기념재단이 행안부 요청에 따라 이랑에게 선곡을 바꿔달라고 요구했으나, 이랑이 거부하자 공연이 아예 엎어졌다는 것이다. 이랑은 “명백한 검열”이라며 반발했고, 파장은 일파만파 번졌다.

이 노래가 실린 이랑 3집 <늑대가 나타났다>는 지난 3월 한국대중음악상 시상식에서 ‘올해의 음반’과 ‘최우수 포크 음반’ 부문을 수상했다. 노래는 이렇게 시작한다.

“이른 아침 가난한 여인이/ 굶어 죽은 자식의 시체를 안고/ 가난한 사람들의 동네를 울며 지나간다/ (마녀가 나타났다~)” 자식을 잃은 가난한 여인은 마녀로 몰리고, 배고픔을 못 이겨 들고일어난 사람들은 폭도·늑대·이단으로 매도된다. 이런 중세 유럽의 광경을 빗대 지금 이 땅에 사는 약자들의 아픔을 담은 노래다.

‘자유민주주의의 근간은 표현의 자유에 있습니다.’ 지난 2월 윤석열 당시 국민의힘 대선 후보가 페이스북에 쓴 글이다. 윤 대통령은 지난 광복절 경축사 연설 13분 동안 ‘자유’를 33번이나 외쳤다. 이 정부가 생각하는 자유에는 ‘표현의 자유’가 빠져 있나 보다. ‘법치’를 내세워 표현의 자유를 옥죄고 윽박지를 자유가 자신들에게 있다고 여기는 듯하다.

1990년대 후반 전세계에서 히트한 노래 하나가 떠오른다. 영국 그룹 첨바왐바의 ‘터브섬핑’(Tubthumping)이다. 그 시절 클럽과 술집에서 지겹도록 흘러나온 마냥 흥겨운 댄스곡으로만 알았는데, 실은 다른 의미가 있었다. 당시 대량 해고 위기에 처한 리버풀 항만 노동자들의 파업 투쟁을 지지하는 노래였다. 노랫말은 이렇다. “난 쓰러졌어. 하지만 다시 일어서지/ 너희는 결코 날 억누를 수 없어”

노동자들이, 문화예술인들이 잠깐 쓰러질 순 있다. 하지만 그들은 기어이 다시 일어나 노래하고 싸운다. ‘늑대가 나타났다’가 부마민주항쟁 기념식에서 울려퍼지진 못했지만, 이번 사태로 되레 더 널리 퍼지게 됐다. 음원사이트와 유튜브에는 “행안부가 홍보해줘서 들으러 왔습니다” “정부가 검열하길래 무슨 노래인가 했더니 명곡이었네요. 뭐가 무서워 노래할 자유도 빼앗는지” 같은 댓글이 달렸다. 이제 우리가 함께 노래할 때다.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의 망령을 내쫓는 노래를.

westmi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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