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4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에서 화물연대 파업과 관련해 관계장관대책회의를 주재하고 있다. 대통령실 제공
[세상읽기] 박복영 | 경희대 교수·전 청와대 경제보좌관
화물연대가 안전운임제 확대를 요구하며 파업을 하고 있다. 이에 대해 대통령실을 비롯한 정부는 확대 불가는 물론이고 안전운임제 존폐 자체도 검토하겠다고 한다. 화주와 화물운송자가 자율적으로 정하면 되는 운송가격을 왜 정부가 개입해야 하는지 묻고 있다. 자유시장 원리를 위배한다는 것이다. 다른 한편에서는 금융감독원이 은행의 금리를 관리하고 있다. 은행별 금리를 당국이 매주 점검하겠다니 실질적 통제나 다름없다. 은행권에서는 볼멘소리가 나오고 관치금융이 부활했다는 비판이 제기된다. 금리는 자금시장 상황, 차주의 위험과 신용도를 평가해 은행들이 자율적으로 결정하면 되는데 정부가 왜 개입하는가? 이 역시 자유시장 원리의 위반이다.
윤석열 대통령은 취임 이후 줄곧 자유 원리를 강조해왔다. 그런데 정부는 안전운임제는 자유 원리의 훼손이라고 비판하면서, 금융당국은 그 원리를 훼손하며 금리를 관리하고 있다. 정부가 자유 원리를 편의적으로 적용하고 있다. 물론 자유시장의 원리는 모든 곳에서 다 적용할 수 없으며, 정부 개입이 필요한 곳이 많다. 현실의 시장은 절대 완전하지 않으며, 자유시장의 결과가 다른 사회적 가치들과 충돌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정부는 시장에 맡겨야 할 곳에는 정부가 개입하고, 정부 개입이 필요한 곳은 시장에 맡기려고 한다.
화물 요율에 정부가 개입한 이유는 화물차 운전자들이 최소한의 생계나 안전이 위협받을 정도로 가격교섭에서 불리한 위치에 있었기 때문이다. 운송서비스 수요자인 화주는 대형 회사인 반면, 공급자인 운전자는 다른 나라와 달리 대부분 개인 차주여서 협상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안전운임제 도입 전인 2019년 시멘트 트럭 운전자의 월평균 임금은 201만원, 월 근로시간은 376시간이었다. 일주일에 하루만 쉰다고 해도 일평균 근로시간이 무려 15시간이고 시간당 임금은 최저임금에 훨씬 못 미치는 5300원 정도였다. 시장원리에 따르면 이들은 이런 저임금 시장을 떠나야 한다. 그런데 개인화물업 특성상 대형트럭이라는 대규모 고정투자를 처분하기 어렵다. 또 일하지 않아도 월 200만~300만원 차량할부금과 유지비는 지출해야 하기 때문에 쉬기도 어렵다. 다른 자영업과 달리 서비스 개선이나 차별화 여지도 거의 없다. 그 결과는 낮은 운임계약이었다. 자신의 임금을 줄이고 장시간 운전으로 몸을 축내고 과속하면서 시장에 남아 있는 것이다. 경제학 교과서 설명처럼 가격신호에 따라 진입과 퇴출이 원활히 이뤄지는 시장이 아니라는 뜻이다. 이들의 최저생계와 사회적 안전을 위해 안전운임제 형태로 정부가 개입한 것이다.
그러면 금융당국이 금리 결정에 개입하는 명분은 무엇인가? 금리 인상과 부동산시장 침체로 일부 자금시장에서 나타나는 경색을 완화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시중은행이 고금리로 자금을 다 끌어가 부동산 프로젝트파이낸싱(PF) 등 다른 부문으로 자금이 공급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문제는 채권시장안정펀드 조성과 같은 좀 더 시장친화적 방식으로 해결할 여지가 얼마든지 있다. 지난 10년 이상 그런 방식으로 대응해왔다. 그리고 부동산 피에프로 자금이 가지 않는 것은 투자자들이 위험이 크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부동산 호황기에 적절한 위험평가 없이 무리하게 투자한 비용이기도 하다. 이야말로 경제원리에 따른 시장의 합리적 대응이다. 이런 위험투자를 금리통제라는 구시대적이고 편리한 ‘행정력’을 이용해 구제한다면, 1997년 외환위기 원인이었던 관행을 되풀이하는 것이다. 과도한 위험추구에 대한 반복적 구제는 도덕적 해이를 불러오고, 다음에는 더 위험한 투자로 이어진다.
앞의 두 경우 중 정부의 개입이 정말 필요한 곳이 어디인가? 시장 진입과 퇴출에 마찰이 크고, 생명과 안전을 위협하는 곳에 정부가 마땅히 서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은 곳에 행정력을 손쉽게 동원하고, 시장의 원리는 편리한 곳에만 적용하는 것이 ‘자유주의’가 아니다. 이 정부의 ‘자유주의’는 결사체를 만들어 집단행동을 하는 사람, 공동체 유지를 위해 세금 인상이 필요하다는 주장에 대한 반감의 미화된 표현에 불과한 것으로 보인다. ‘자유주의’가 원칙 없이 권력자의 판단에 따라 선택적으로 적용될 때, 시민은 움츠러들고 권력의 위세는 커진다. 지금 세상 사람들은 그것을 걱정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