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7월25일 서울 용산구 대통령실 집무실에서 김현숙 여성가족부 장관에게 업무보고를 받고 있다. 공동취재사진
[젠더 프리즘] 이정연 | 젠더팀장
미라발 집안의 세 자매 파트리아, 미네르바, 마리아 테레사. 도미니카공화국의 세 자매가 1960년 11월25일 한꺼번에 목숨을 잃었다. 교통사고가 난 듯 시신은 그들이 타고 있던 차에서 발견됐다. 위장된 사고였다. 30년 독재 권력을 휘두르던 라파엘 트루히요가 보낸 암살자의 손에 살해당했다. 세 자매는 반독재 운동을 끈질기게 이어가던 사람들이었다. 여성의 기본권 신장을 위한 목소리를 내는 데도 앞장섰다.
“그들이 나를 죽인다면, 나는 무덤에서 팔을 뻗을 것이고, 나는 더 강해질 것이다.” 미네르바 미라발은 자신의 죽음을 예언하듯 생전에 이런 말을 남겼다. 그의 말은 헛되지 않았다. 1961년 독재자 트루히요는 암살당했다. 세 자매가 남긴 여성의 권리 신장을 요구하는 목소리는 중남미 전역으로 퍼져 나갔다. 2000년 유엔은 총회에서 세 자매가 목숨을 잃은 날을 ‘세계 여성폭력 추방의 날’로 결의하기에 이른다.
유엔은 해마다 11월25일부터 세계인권선언기념일인 12월10일까지를 ‘세계 여성폭력 추방 주간’으로 정하고 있다. 한국 정부도 이에 발맞춘 활동을 펼치고 있다. 정부는 2020년부터 해마다 11월25일~12월1일을 여성폭력 추방 주간으로 정해 여성폭력 근절에 대한 관심을 끌어올리기 위한 다양한 활동을 했다.
올해 여성폭력 추방 주간에 주무부처인 여성가족부가 어떤 일을 했는지 살폈다. 평소 김현숙 여가부 장관은 명백한 여성폭력 사건을 두고도 “그건 안전의 문제다”(인하대 성폭행 사망 사건) 등의 주장을 펼쳐온 터였다. 그러나 유엔여성기구(UN Women)가 지난달 25일 공개한 페미사이드 관련 보고서를 보면, 매시간 5명의 여성이 친밀한 관계의 가해자 손에 목숨을 잃는다. 이런 마당에 설마 여성폭력 추방 주간에 ‘여성폭력’을 부정하는 주장을 하지는 않겠지? 참 섣부른 기대였다.
지난 1일 여성폭력 추방 주간 마지막 날이었다. 이날 오후 여가부는 ‘제3차 앙성평등정책 기본계획(안)(2023~2027)’을 갖고 내외부 전문가를 모아 공청회를 열었다. 기본계획(안)에 ‘여성폭력’ 등의 정책 용어를 1, 2차 때와 달리 ‘폭력’으로 바꿔 놓았다. ‘여성폭력’이 난데없는 용어도 아니다. ‘여성폭력방지기본법’이 있을 정도다. 공청회에서 바로 반박이 나왔다. “젠더 문제를 전면에 드러내지 않는 의제나 정책 과제가 양성평등정책 기본계획의 취지에 부합하는지 의문이 있다.”(강은영 한국형사·법무정책연구원 선임연구위원)
이 문제를 <한겨레>가 보도하자, 여가부는 지난 3일 오후 보도설명자료를 냈다. 여가부는 “다양하고 포괄적인 모두를 위한 양성평등정책을 담았다”며 “제3차 양성평등정책 기본계획의 대과제의 제명(제목)인 ‘폭력피해 지원 및 건강권 보장’도 이런 방향성을 반영한 것이며, 세부과제의 제명에서는 사안에 따라 ‘성별에 기반한 폭력’과 ‘여성폭력’ 용어도 함께 사용하고 있다”고 했다. 그렇다니 더욱 의아하다. 세부과제에도 넣는 명칭을 굳이 대과제에는 이를 바꿔 ‘폭력’이라고 명명한 이유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이런 빈약한 설명에 다시 떠올릴 수밖에 없다. 신당역 스토킹 살인 사건을 두고도 김현숙 장관은 “남성·여성의 틀로 보는 것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했다.
올해 여성폭력 추방 주간은 이렇게 지났다. 김현숙 장관이 오로지 힘쓰는 분야는 여가부 폐지로 보인다. 그렇더라도 그가 윤석열 대통령이나 대통령실에 귀띔 한번쯤은 해도 좋았을 일이 있다. 여성폭력 추방 주간에 윤석열 대통령이 에스엔에스(SNS)에라도 대국민 메시지를 내놓았으면 어땠을까? 올 한 해 인하대 사건, 신당역 사건 등을 통해 여성폭력의 잔인한 실상을 마주한 시민들에게 여성폭력 추방에 힘쓰겠다는 말 한마디는 할 수 있는 거 아닌가? 2020년, 2021년의 여성폭력 추방 주간과 영 달라서 하는 말이다. 품격까지는 바라지 않는다. 관심 있는 척이라도 바랄 뿐이다.
xingxing@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