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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우리집에 성탄절은 없다

등록 2022-12-01 18:56수정 2022-12-01 19:33

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삶의 창] 이명석 | 문화비평가

옛날 옛적 호랑이는 담배를 끊었지만 나는 아직 학교에 들어가기 전이었다. 겨울이 문지방을 기웃거리며 진눈깨비를 흩뿌리던 날, 맏누이가 다섯 남매를 불러 모았다. 몸을 움츠리게 하는 서늘함은 뚝 떨어진 수은주 때문만은 아니었다. 누이는 짧게 말했다. “우리집은 불교다.”

남매들은 잠시 상념에 젖은 눈으로 막내인 나를 본 뒤 흩어졌다. 멀뚱히 혼자 남은 나는 뒤늦게 깨달았다. 우리집은 성탄절이 없고, 산타클로스도, 선물도 없다는 말이었다. 그것은 종교적인 교시가 아니었다. 그즈음 설날에 삼촌이 했던 말과 같은 뜻이었다. “올해는 불경기라서 세뱃돈은 없다.” 그 이후 한번도 불경기가 아닌 해는 없었다.

그럼에도 12월의 우리집엔 어떤 설렘이 가득했다. 가톨릭 여학교에 다녔던 누나는 친구들을 불러 카드를 만들곤 했다. 망사 무늬를 이용해 배경을 그리고 칫솔로 물감을 튀겨 눈을 내렸다. 나도 옆에서 사슴, 다람쥐, 소나무 따위 그림을 더하기도 했다. 거기에 크리스마스실을 붙이고 손글씨로 소식을 적어 우체통에 넣었다. 우리집은 불교니까 명목상으론 성탄카드가 아니라 연하장이었다.

그로부터 삽십년쯤 뒤, 나는 여행프로그램에 출연하기 위해 오스트리아와 체코를 방문했다. 첫 일정으로 빈에 도착했는데, 마침 유럽에서도 가장 크다는 크리스마스 마켓을 개장하는 날이었다. 시청 앞엔 온갖 인형, 장난감, 과자를 실은 수레들이 나와 있고, 예쁜 코트를 입은 아이들이 한아름 선물을 안고 있었다. 체코로 넘어가 프라하, 올로무치, 체스키 크룸로프에서도 계속 비슷한 모습을 보았다. 그야말로 크리스마스가 세상을 뒤덮고 있었다.

나는 신기한 풍경에 놀라다 이런 생각을 했다. 성탄절은 한달이나 남았는데? 어느 가게에서 애드번트 캘린더(advent calendar)를 보고선 이 풍습의 내력을 짐작할 수 있었다. 이 입체형 달력은 크리스마스 4주 전인 강림절부터 벽에 걸어둔다. 하루에 하나씩 상자를 열면 초콜릿이나 사탕을 꺼낼 수 있고, 그걸 까먹으며 크리스마스 진짜 선물을 기다린다. 부러웠다. 선물 자체보다 한달 동안 꾸준히 기대하는 마음을 이어갈 수 있다는 사실이.

다시 많은 해가 지났고, 기나긴 성탄 시즌과 거창한 선물 풍습도 이 나라에 옮겨왔다. 어린 나는 성탄 선물을 쉽게 체념했고 큰 불만이 없었다. 주변 아이들의 사정도 크게 다르지 않아 시샘할 일이 없었을 거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거리의 쇼윈도와 광고판, 또래들의 에스엔에스(SNS)와 단톡방에는 선물상자들이 넘쳐난다. 그 상자들이 커지고 빛날수록 어디선간 그림자가 깊어질 것이다. 분명 이 세상엔 그 기쁨의 폭죽에 열광할 수 없는 아이들도 있기 때문이다.

빈의 화려한 크리스마스 마켓을 떠올릴 때마다 서늘한 기억이 따라온다. 아이들이 직접 케이크를 만드는 행사를 구경하고 화장실에 들어갔더니, 옹졸한 세면대에서 중년 남자가 크림이 잔뜩 묻은 접시와 식기류를 씻고 있었다. 오가는 이들의 눈치를 보며 힘겹게 설거지하는데, 동료가 또 한 무더기 접시를 가져다주며 동유럽 말을 주고받았다. 나는 손을 씻고 나오며 생각했다. 그는 언제까지 접시를 씻어야 할까? 성탄절엔 고국에 돌아가 자신의 아이들에게 선물을 전할 수 있을까? 독일 동화에 나오는 영원한 저주의 형벌이 떠올랐다.

“우리집에 성탄절은 없다.” 입 밖으로 내뱉지 않더라도 마음속에서 이 말을 되뇌는 아이들이 지금도 있으리라. 그들 모두를 구원하는 방법을 미약한 내가 알 수 있겠나? 다만 내 앞의 선물상자를 위해, 이 한달을 더 혹독히 일해야 할 사람들과 그 아이들을 돌아보았으면 한다. “산타클로스는 최초의 화물운송노동자다.” 1949년 미국 화물운송노조의 홍보지에 나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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