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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남종영의 인간의 그늘에서] 흑두루미, 고난과 개척의 역사

등록 2022-11-30 19:36수정 2022-11-30 19:40

흑두루미는 인간의 위협에 맞서 새로운 하늘길과 삶터를 개척해왔다. 2010년대 중반 이후 국내 최대 월동지가 된 순천만에서 비행하고 있는 흑두루미. 순천시 제공
흑두루미는 인간의 위협에 맞서 새로운 하늘길과 삶터를 개척해왔다. 2010년대 중반 이후 국내 최대 월동지가 된 순천만에서 비행하고 있는 흑두루미. 순천시 제공

남종영 | 기후변화팀 기자

10여년 전 경북 구미 해평습지에 간 적이 있다. 러시아에서 출발한 흑두루미 2천~3천마리가 세계 최대 흑두루미 월동지라는 일본 규슈의 이즈미로 가는 길에 쉬어가는 모래밭이다. 이른바 ‘낙동강 루트’라고 불리는 장거리 비행길에서 흑두루미들은 이곳 ‘철새들의 휴게소’에서 배를 채우고 며칠 쉰 뒤 다시 날갯짓한다.

그런데, 그해 가을 러시아에서 날아온 흑두루미들은 앉을 곳을 찾지 못했다. 4대강 사업으로 모래밭이 물에 잠겼기 때문이다. 졸지에 수몰민 신세가 된 흑두루미는 당황했고(어? 휴게소가 없어졌어!), 4대강 사업이 끝나기도 전인 2010~11년 해평습지 도래 개체 수는 반토막이 났다.

당시 이런 사실을 담은 기사를 썼는데, 환경부는 오히려 다른 곳 철새는 늘어났다고 ‘눈 가리고 아옹’식의 해명을 했다(낙동강에 갈 데가 없으니, 늘어나는 게 당연하지!). 2013년 <이명박 정부 국정백서>에는 ‘다 도망갔다는 철새들, 오히려 많아져 걱정’이라는 황당한 평가가 실렸다. 일년만에 돌아와 제집의 수몰을 본 철새들이 충격 속에서 허둥대며 새 삶터를 찾고, 그 과정에서 뒤따를 삶의 질 하락과 멸종위협에 관해서 당시 환경부는 일언반구도 없었다.

나는 그 많던 흑두루미는 어디로 갔을지 걱정이 됐다. 낙동강을 따라 대한해협으로 가는 ‘낙동강 루트’가 기다란 호수가 됐으니, 흑두루미가 비상상황에도 앉을 수 없는 형편이었다. 마치 갓길 없는 고가도로가 돼버리고 만 셈이다.

4대강 사업이 끝나고 조류학자와 탐조가들로 인해 비밀은 서서히 밝혀졌다. 먼저, 흑두루미는 논스톱으로 일본까지 가는 ‘고행의 하늘길’을 택했다. 말하자면, 싱가포르에서 미국 뉴욕까지 한번도 안 쉬고 19시간을 가는 싱가포르항공처럼 난 것이다. 어지간한 체력이 없는 흑두루미는 도태할 수밖에 없는 고행의 낙동강 루트.

그러나 흑두루미는 혁신가이기도 했다. 천수만과 순천만을 통해 서쪽으로 돌아가는 우회로를 개척한 것이다. 한두해가 지나니 아예 순천만에서 겨울을 나는 흑두루미도 많아졌다. (이곳이 일본보다 따뜻하고 먹이도 많아!) 생태관광지로서 순천만의 잠재력을 보고, 낙곡을 수거하지 않고 뿌려 둔 순천시의 노력이 결정적이었다. 2010년대 중반에 이르러 순천만은 국내 흑두루미의 최대 월동지가 됐다.

순천시는 2014년 12월 ‘천학의 도시’가 됐다고 축포를 쏘아 올렸다. 흑두루미 966마리 등 1천마리 학이 도래한 것이다. 순천만에서 겨울을 나는 흑두루미는 점차 늘어 지난해 기준 3천마리 수준이다.

그런데, 올겨울 또 다른 걱정이 생겼다. 흑두루미가 평년 수준을 넘기며 계속 날아들어 1만마리 가까워진 것이다.

좋은 소식이 아니었다. 일본 이즈미에서 일어난 조류인플루엔자와 관련 있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하루 수백마리까지 이르는 대량폐사를 목격한 이즈미의 흑두루미들이 다시 발길을 돌려 순천만으로 피난 온 거 아니냐는 것이다. 기현상이었다. 철새들이 재난을 피해 대규모로 장거리 이동한 현상이 관찰된 적은 없다. 서울동물원장을 지낸 두루미연구자 이기섭 한국물새네트워크 대표는 “이런 현상을 본 건 처음”이라며 “올겨울 조류인플루엔자가 계속될 텐데, (새들의 밀도가 높아진) 순천만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걱정”이라고 말했다. 우리는 감염병 재난에 창조적으로 대응하는 방식을 흑두루미에서 보고 있다.

철새들 삶의 최대 과업은 ‘장거리 비행’이고, 또 하나는 ‘월동지 개척’이다. 거기에 간난과 고난과 역경과 도전이 있다. 인간이 댐과 보를 쌓고 준설하고 간척하면서, 흑두루미의 여행은 갈수록 높아지는 허들을 넘는 트랙과 비슷해지고 있다.

일본에서 피난 온 흑두루미로 지금 순천만은 ‘만석’이다. 다행히 1만마리를 정점으로 줄어들었는데, 주변 습지와 하천으로 흩어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흑두루미는 이번 위험을 어떻게 이겨내고 삶을 개척할까? 안타까운 것은 제2의 순천만, 제3의 순천만이 더는 없다는 것이다.

지난여름 맹독성 녹조가 핀 낙동강 유역 도시에서는 독성물질인 마이크로시스틴이 수돗물에서 검출돼 홍역을 치렀다. 이번 정부 들어 ‘4대강 조사평가단’을 해체하고 4대강 재자연화를 포기한 환경부는 마이크로시스틴 검출방법을 두고 환경단체와 논란을 벌이는 데 시간을 허비했다. 10여년 전 우리가 흑두루미 입장에서 4대강 사업을 바라봤다면, 오늘날 우리가 수돗물 녹조사태 같은 건 대면하지 않았을 것이다. 인간과 동물의 건강은 연결돼 있다.

fand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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