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이 지난 10월28일 광주광역시에 위치한 삼성전자 협력회사 디케이를 방문해 생산라인을 돌아보고 있다. 회장 승진 이후 첫 방문지로 협력업체를 선택한 것은 상생경영 의지를 보여주기 위한 포석으로 보인다. 삼성전자 제공
곽정수 |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선임기자
“국민에게 조금이라도 더 신뢰받는 기업을 만들겠다.”
이재용 회장이 지난 10월27일(회장 승진 발표일) ‘부당합병 및 회계부정 사건’ 1심 재판을 받고 나오면서 다짐한 말이다. ‘신뢰받는 삼성’을 만들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 회장은 이미 2년 전인 2020년 5월 ‘대국민사과’에서 그 답을 내놨다. “삼성은 글로벌 일류기업으로 성장했습니다. (중략) 하지만 그 과정에서 국민에게 실망을 안겨드리고 심려를 끼쳐드리기도 했습니다. (중략) 법과 윤리를 준수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로부터 한달. 이 회장 약속의 진실성을 가늠할 수 있는 기회를 맞았다. 삼성생명이 보유한 삼성전자 주식 문제다. 삼성생명의 고객 돈으로 전자 주식을 사들여 이 회장의 삼성 지배 수단으로 이용하는 문제는 삼성 지배구조의 아킬레스건이다. 그동안 이를 개선하기 위해 보험업법 개정안이 수차례 국회에 발의됐지만 모두 무산됐다.
그런 점에서 지난 22일 국회 정무위원회 법안심사소위에서 더불어민주당의 박용진·이용우 의원이 발의한 이른바 ‘삼성생명법’(보험업법 개정안)이 심도 있게 논의된 것은 매우 획기적이다. 여야가 원칙적으로 법 개정 취지에 공감을 이뤘다. 개정안은 보험회사가 보유한 계열사 주식의 평가 기준을 보험업법 감독규정에서 정한 취득원가 대신 시가로 바꾸는 내용이다.
보험업법 106조는 보험회사가 계열사 주식을 총자산의 3%(또는 자기자본의 60%)를 초과해서 취득하지 못하도록 제한한다. 계열사 주식을 과도하게 보유했다가 재정이 부실해져 보험금을 지급하지 못하는 것을 막고 계열사 부당지원도 차단하기 위한 규제다. 삼성생명이 보유한 삼성전자 지분 8.5%의 취득원가는 5천억원대에 불과하지만, 시가는 30조원에 이른다. 법 취지로 보면, 삼성생명 총자산의 3%(8조원 정도)를 넘는 주식은 보유할 수 없다. 하지만 계열사 주식 평가는 취득원가로 한다는 ‘괴이한’ 감독규정에 따라 규제를 안 받는다. 삼성전자 주식 1.5%를 가진 삼성화재도 비슷한 특혜를 누린다.
이 회장이 삼성생명과 화재가 보유한 전자 지분 10%에 집착하는 이유는 명확하다. 삼성의 지배구조는 이씨 일가→삼성물산→삼성생명→삼성전자→다른 계열사로 이어지는 사슬 구조다. 이 회장의 삼성전자 지분은 1.63%에 불과하다. 삼성생명과 화재의 전자 지분 10%는 이 회장이 삼성을 지배하는 데 핵심 역할을 한다.
반면 삼성생명의 전자 주식 보유로 보험계약자와 일반주주들은 큰 피해를 보고 있다. 삼성생명은 과거 계약자들이 낸 보험료로 투자를 해서 이익이 나면 배당해주는 상품(유배당상품)을 대규모로 팔았다. 삼성전자 매입 자금의 90% 정도가 이런 계약자들이 낸 보험료다. 하지만 160만명의 유배당 보험계약자들은 수십년째 배당을 못 받고 있다. 삼성생명이 이 회장의 지배권 유지를 위해 삼성전자 주가가 아무리 올라도 팔지 않기 때문이다.
보험회사 자산운용 규제의 취지와 배치되는 보험업법 감독규정이 비정상인 이유는 차고 넘친다. 그런데도 삼성은 국회의원들에게 ‘참고자료’를 돌리며 법 개정에 반대하고 있다. 민간 기업이 의견을 내는 것은 비난할 일이 아니지만, 내용이 전혀 설득력이 없다는 게 문제다. 일례로 삼성전자 주식 30조원어치가 한꺼번에 시장에 풀리면 큰 충격이 예상되고 개인투자자에게 피해를 준다는 주장은 얼핏 그럴듯하게 들린다. 수구 보수언론도 “개미들에게 날벼락”이라며 불안감을 조성한다. 하지만 사실 왜곡이다. 오히려 반대다. 삼성생명이 전자 주식을 팔아 수십조원의 차익을 실현하면 160만 유배당 보험계약자는 5조~6조원 정도를 배당받는다. 나머지 차익도 투자와 배당 재원으로 사용할 수 있으니 일반주주에게 희소식이다.
600만 삼성전자 주주들도 걱정할 게 없다. 이재용 회장이 그룹 지배에 핵심 역할을 하는 삼성전자 지분 처리에 손을 놓을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순진하다. 시장에서는 삼성전자가 100조원이 넘는 여유자금으로 자사주 형식으로 사들인 뒤 소각하는 방안을 유력하게 본다. 삼성전자가 시가총액의 10분의 1에 이르는 자사주를 소각하면 주가는 급등할 것이다. 삼성도 수년 전부터 삼성전자의 자사주 매입 방안을 검토해온 게 미래전략실 내부문건(프로젝트 G)으로 확인된 바 있다. 이용우 의원은 친절하게도 삼성전자가 자사주를 손쉽게 살 수 있도록 자본시장법 개정안을 발의할 계획이다. 보험업법 개정안에도 한도초과 주식을 5~7년 안에만 팔면 되는 완충장치를 두었다.
일부 수구 보수언론은 이재용 회장의 경영권이 흔들릴 수 있다고 주장한다. 언론이 민간기업의 경영권을 걱정하는 것도 의아하지만, 실제 그런 일이 벌어질 가능성은 희박하다. 외국인 투자자에 대한 대책도 나와 있다. 국가의 안전과 공공질서의 유지에 지장을 주는 경우 외국인 투자를 제한하는 외국인투자촉진법(4조)을 원용하는 방법이다. 이용우 의원은 “한국의 핵심산업인 반도체를 영위하는 삼성전자 같은 기업에 대해 외국인이 적대적 인수합병을 시도하는 경우 투자를 제한하는 규정을 반도체법 등에 넣으면 된다”고 말했다.
경제개혁연대가 본격적으로 삼성생명 문제를 제기한 게 2000년대 초다. 국회에서는 2014년 이후 이종걸·박용진·이용우 의원이 잇달아 보험업법 개정안을 발의했지만 모두 실패했다. 금융감독당국과 국민의힘의 묵인과 비호가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금융위 상임위원을 지낸 박대동 전 새누리당 의원은 19대 국회에서 공개적으로 보험업법 개정안에 반대하더니, 임기가 끝난 직후인 2017년 삼성화재 사외이사를 ‘용감하게’ 맡았다. 박용진·이용우 의원이 보험업법 개정을 주도하고 있지만, 더불어민주당도 마냥 떳떳한 것은 아니다. 문재인 정부 5년간 보험업법 개정을 뒷전으로 미뤄놨다가, 지금 와서 법 개정이 시급하다고 말하는 것을 국민은 어떻게 볼까?
수십년간 지속돼온 삼성의 비정상적인 특혜를 계속 방치하는 것은 법치국가와 공정시장을 추구하는 한국 사회에 큰 오점이다. 가장 바람직한 것은 삼성 스스로 결자해지하는 것이다. 이 회장이 보험업법 개정에 대해 억울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잘못된 법은 고쳐야 한다. 비정상적인 법에 계속 의존하는 순간 스스로 적폐로 전락한다.
삼성은 2006년 안기부 엑스파일 사건, 2008년 비자금 특검 사건 등으로 국민의 비난이 쏟아질 때마다 대국민사과를 통해 잘못된 관행에서 벗어나 국민에게 믿음과 신뢰를 주는 기업이 되겠다며 혁신을 다짐했다. 하지만 2017년 국정농단 세력에게 뇌물을 준 혐의로 이 회장이 구속기소됐다. 당시 미국의 <월스트리트 저널>은 사설을 통해 “이재용 회장의 구속이 삼성 지배구조 혁신을 촉진해 삼성과 한국 경제에 득이 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이재용 회장의 결단이 필요하다. 국민에게 한 ‘신뢰받는 삼성’ 약속이 진심이라면 행동으로 보여줘야 한다. 삼성이 끊임없는 혁신으로 글로벌 일류기업의 자리를 지키고 미래 신사업에 과감히 도전하는 것도 중요하다. 하지만 ‘이재용 시대’는 삼성 오너 리스크의 원천이었던 후진적이고 비정상적인 지배구조를 정상화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삼성의 경영권이 단순히 주식 지분에만 의존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이재용 회장은 경영 능력과 시장 신뢰에 기반해서 경영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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