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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크리틱] 11월

등록 2022-11-24 18:36수정 2022-11-24 20:03

빌헬름 하메르스회이, <스트란대로 30번지의 실내>(1900). 위키미디어 코먼스
빌헬름 하메르스회이, <스트란대로 30번지의 실내>(1900). 위키미디어 코먼스

김영준 | 전 열린책들 편집이사

“이번 11월에는 너한테 전해줄 소식이 없구나.”

미국 시인 앤 섹스턴이 친구에게 보낸 편지의 한 구절이다. 이유는 알 수 없는데, 이 평이한 구절이 소셜네트워크에서 가장 자주 인용되는 섹스턴의 문구 중 하나가 됐다. 11월이 되면 많은 사람이 비슷한 느낌을-황량한 내면과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외부세계가 하나로 이어진 듯한 감정 상태를-경험하게 되는 모양이다. 이 느낌을 사람들이 정말로 싫어하느냐는 또 다른 문제다.

이 ‘11월의 감정’의 상당 부분은 11월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특이한 달이어서가 아니라(그건 불가능하다) 우리가 그에 부여한 역할에서 나온다. 11월은 옆으로 비켜서 회고하는 달이다. 비키는 건 우리지 11월이 아니다. 이때가 되면 매체들은 올해의 기억들을 정리해서 보여주기 시작한다. 대체로 ‘올해의 책’ 목록이 가장 먼저 나오고, 이어 올해의 영화, 공연, 히트상품 등이 차례로 게재되는 것이 보통이다. 올해의 인물이나 사건 사고는 조금 늦게 발표되는 편이지만 이들도 12월이 되자마자 공개할 수 있도록 현재 온라인 투표가 진행되고 있다.

이런 회고에 수고와 시간이 들지 않는 건 아니다. 지난주 서평지 <타임스 리터러리 서플러먼트>는 매년 그랬듯 올해의 책 목록을 발표했다. 이 목록은 60여명 작가로부터 받는 독후감으로 돼 있기 때문에 준비기간을 고려하면 대부분의 원고가 10월 이전에 쓰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올해의 책 코너에 실을 선생님의 원고를 부탁드립니다’ 하는 청탁서는 8월에는 도착해야 할 것 같다. 휴가철 연락의 어려움을 생각하면 7월이어야 할지도 모른다… 이것은 기계적인 추산일 뿐 실제로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야 알 수 없다. 요점은 연말결산이 한참 전에 준비되며, 검토 대상이 되는 한해의 실제 기간은 생각보다 짧다는 것이다.

매년 두어달 앞서 진행되는 올해 결산에 피로감을 갖지 않기란 어려운 일이다. 업계인들은 규칙적인 마감과는 별도로 1년 단위로 작용하는 마감 압박을 의식하게 된다. 한해는 1월에 시작해 10월에 끝나 버린다. 10월까지 출시하지 못한 신제품은 ‘올해의 것’으로 거론될 기회를 갖지 못하기 때문이다. 업계인이 아닌, 경제적 이해가 없는 일반인들도 한해가 이렇게 10개월, 300일에 불과한 것으로 취급받으면 정서적인 스트레스를 받는다. 누군가 아주 쉬운 산수를 틀리고 있는데 아무도 바로잡지 않는 악몽을 꾸는 느낌 비슷할 것이다.

지금까지 이 글이 이 관행을 비판하는 것처럼 보였다면 양해를 구한다. 실은 반대로, 나는 점점 더 한해를 열달만 있는 척하고 빨리 마무리하는 게 꽤 사리에 맞는 일이라고 느끼게 됐다. 왜 12월31일이 지난 뒤에 결산하지 않는 걸까? 새해의 입구이자 일부인 진짜 연말은 회고하기에 적당한 시점이 전혀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새해를 살아가는 느낌을 미루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 강력한 열망 앞에선 지난해의 목록 같은 건 별 흥밋거리가 못된다. 아마 우리는 산다는 것과 회고하는 것이 양립하기 어려운 활동이라는 것을 무의식적으로 아는 것이다. 그렇다면 한해를 정리하기에 적당한 시점은, 아무도 진짜 연말이라고 여기지 않는 시기, 늦가을의 어느 달일 수밖에 없다.

두달 빠른 결산 관행이 암시하는 교훈이 있다면 이런 것이다. 우리에게 별도의 시간이 주어지는 일은 영원히 없으며, 생각과 정리에 쓸 시간은 우리가 생활하는 시간을 헐어서 마련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하필 11월을 회고의 달로 만든 것은 나쁜 선택 같아 보이지 않는다. 아마 우리의 회고는 11월 날씨 덕분에 좀 더 감정이 풍부하고 내면적인 것이 돼왔을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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