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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김누리 칼럼] 기계가 채점하는 ‘수학능력’ 시험 유감

등록 2022-11-22 18:49수정 2022-11-22 21:44

한국식 수능은 우리 아이들에게서 ‘심연’을 앗아간다. 시간의 압박 속에서, 정해진 선택지 안에서 정답을 고르는 데 익숙해진 아이일수록 자신만의 고유한 내면의 ‘우물’을 갖기 어렵다. 사유의 물이 고일 시간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자아, 정체성, 개성이 자랄 내적 공간은 지극히 협소해진다.
청소년 인권행동 아수나로와 대학입시거부로 삶을 바꾸는 투명가방끈, 교육공동체 나다 등 청소년 단체들이 지난해 11월18일 오전 서울 중구 태평로 서울파이낸스센터 앞에서 2021 입시경쟁 반대 청소년 선언 발표를 하고 있다.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청소년 인권행동 아수나로와 대학입시거부로 삶을 바꾸는 투명가방끈, 교육공동체 나다 등 청소년 단체들이 지난해 11월18일 오전 서울 중구 태평로 서울파이낸스센터 앞에서 2021 입시경쟁 반대 청소년 선언 발표를 하고 있다.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김누리 | 중앙대 교수·독문학

눈에 거슬리는 게 천지인 요즘이지만, 지난주 거리에서 마주친 온갖 펼침막들은 특히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수능대박” “사랑한다, 응원한다” “꿈을 응원합니다”. 이런저런 정당에서 붙여놓은 ‘수능 펼침막’은 참으로 불편하고 불쾌했다.

도대체 무엇을 하자는 것인가. ‘수능대박’이라니, 대학 수학능력시험이 무슨 도박이라도 된다는 것인가. 매일같이 우리 아이들을 ‘사활을 건 전쟁터’에 몰아넣고도 ‘사랑’을 운위할 수 있단 말인가. 꿈을 응원한다니, 아이들에게 과연 꿈을 꿀 여유를 준 적이 있는가.

아무리 정당에서 내건 정치적 수사라지만, 이 나라 어른들의 말은 너무도 기만적이고, 어른들의 태도는 너무도 파렴치하다. 언제까지 우리 아이들을 세계 최악의 폭력적 경쟁 교육에 밀어 넣은 채 일등이 되라고, 승자가 되라고, 대박을 치라고 ‘응원’할 것인가.

진정 우리 아이들을 사랑한다면, 이제 그들을 살인적인 경쟁의 지옥에서 건져내야 한다. “시험 볼 때마다 내 자존심이 하나하나 깎여나가는 느낌이다.” “우리를 죽이는 게 다 어른들이고 나라다.” “제발 좀 살려주세요. 이러고 살기 싫어요.” 학생들의 처절한 절규가 더는 들리지 않는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

얼마 전 헌법재판소 앞 수능시험 상대평가에 대한 위헌소송을 제기하는 자리에 참석했다. 여기서 김종영 경희대 교수는 매우 의미심장한 얘기를 했다. 이태원 골목에서 병목으로 인해 희생당한 젊은이의 수가 150여명인데, 대한민국 학교에서 대학 병목으로 인해 매년 자살하는 학생 수가 대략 150명 내외라는 것이다. 우연의 일치치고는 너무도 상징적이다. 거리의 병목이 젊은이를 죽음으로 몰아갔듯이, 대학의 병목이 학생들의 목숨을 앗아가고 있다. 거리의 병목이 낳은 참사에는 ‘책임자’를 찾는다고 떠들썩하지만, 해마다 정기적으로 일어나는 대학 병목이 야기한 비극에는 아무도 책임지지 않으며, 아무도 관심 갖지 않는다.

수능시험은 참으로 문제가 많은 제도다. 그중에서도 수능시험의 가장 고약한 점은 상대평가에 있다. 아이들의 지적 수준이 아니라, 성적 순위를 평가하는 것이다. 그러니 모든 학생은 서로에게 경쟁자이자 적이 된다. 나의 불행이 남의 행복이 되고, 남의 불행이 나의 행복이 되는 구조다. ‘상대평가 위헌 선언문’은 천명한다.

“상대평가 체제는 학생들을 끊임없이 경쟁시키고 옆 친구보다 한 시간이라도 더 자지 않고 공부하고 한 문제라도 더 맞혀야 한다고 주입한다. 학생들에게 경쟁에서 살아남으라고 강요하고 친구를 경쟁자로 만드는 사이, 우리 사회는 타인의 고통에 대한 연대와 공감을 잃고 인간성을 상실해가고 있다. 누군가를 짓밟고 거둔 승리에 대한 강요, 단 1%의 변별을 위한 평가는 그 목적이 정당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자기파괴적이고 비교육적이며 반인간적이다.”

기계가 채점한다는 것도 수능시험의 심각한 문제다. 선진국 가운데 대학입시라는 ‘결정적인 시험’을 기계가 채점하는 나라는 대한민국밖에 없다. 기계가 채점하는 시험은 결국 정해진 정답을 고르는 시험이다. 아직도 이런 시험을 치른다는 것은 우리 사회가 얼마나 시대착오적인지 보여준다. 기계가 채점하는 시험에 능한 아이들은 결코 미래를 선도하는 인재가 될 수 없다. 4차 산업혁명 시대가 요구하는 것은 기계로 대체될 수 없는 능력을 갖춘 인재이다. 인공지능과 로봇이 도저히 대체할 수 없는 인간 고유의 능력은 비판하는 능력, 사유하는 능력, 상상하는 능력, 공감하는 능력이다. 인간을 단순히 암기능력으로 평가하는 교육은 시대를 역행하는 교육이다. 인간을 질 낮은 컴퓨터로 만드는 것이 교육의 목표일 수 없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수능시험이 미치는 가장 큰 해악은 그것이 우리 아이들의 내면을 황폐화한다는 데 있다. 한국식 수능은 우리 아이들에게서 ‘심연’을 앗아간다. 시간의 압박 속에서, 정해진 선택지 안에서 정답을 고르는 데 익숙해진 아이일수록 자신만의 고유한 내면의 ‘우물’을 갖기 어렵다. 사유의 물이 고일 시간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자아, 정체성, 개성이 자랄 내적 공간은 지극히 협소해진다. 심연이 없는 아이일수록 자아는 약하고, 정체성은 불안하며, 개성은 희미하다.

한국식 수능은 한국의 엘리트를 미성숙한 인간으로, 대한민국을 시대착오적인 국가로 만드는 주범이다. 이제 아이들을 무한경쟁으로 내모는 상대평가를 끝내야 한다. 기계가 채점하는 야만 교육을 끝내야 한다. 우리 아이들의 내면에도 심연이 자라날 공간을 주어야 한다. 그래야 성숙한 인간이 된다. 수능 폐지가 출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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