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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허울뿐인 선진국이라는 “껍데기 가라”

등록 2022-11-20 19:31수정 2022-11-20 20:05

지난 8월16일 오전 서울 용산 대통령실 앞에서 열린 폭우 희생자 추모주간 선포 기자회견에서 한 참석자가 ‘불평등이 재난이다’라고 적힌 손팻말 위에 흰 국화 한송이를 올려둔 채 바닥에 앉아 있다.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지난 8월16일 오전 서울 용산 대통령실 앞에서 열린 폭우 희생자 추모주간 선포 기자회견에서 한 참석자가 ‘불평등이 재난이다’라고 적힌 손팻말 위에 흰 국화 한송이를 올려둔 채 바닥에 앉아 있다.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세상읽기] 윤홍식 | 인하대 사회복지학과 교수·소셜코리아 운영위원장

정말 “선진국”이 된 줄 알았다. 일제강점, 해방, 분단, 전쟁을 거치면서 세계에서 가장 가난했던 나라가 국내총생산(GDP) 규모에서 세계 10위로 올라섰다. 1인당 실질 지디피와 임금 수준은 이미 일본을 추월했고 1인당 명목 지디피도 빠르면 올해 늦어도 근시일 내 일본을 앞설 것이라고 한다.

어디 이뿐인가. 우리 문화는 세계인이 즐기는 글로벌 문화가 되었다. 정부 수립 이후 수십년 동안 엄혹한 독재를 경험했지만, 1987년 민주화 이후 민주주의는 점점 더 공고해진다고 믿었다. 우리가 직면한 심각한 사회경제 문제조차 “선진국” 대한민국이 치러야 할 비용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아니었다. 한국은 심각한 사회경제적 문제를 안고 있는 “이상한 선진국”이 아니라, 물질적 풍요를 빼고 거의 모든 것이 성숙하지 않은 “이상한 후진국”이었다. 그렇지 않고서는 세월호 참사를 겪은 지 10년도 되지 않아 국가가 다시 국민의 안위를 저버리고 그 책임까지 부인하는 상황이 반복되는 현실을 설명할 방법이 없다.

그간 우리가 만들었다고 생각한 “선진적” 시스템은 작동하지 않았다. 민주주의 사회이기 때문에 무능한 사람들도 대통령이 될 수도 있고 무능한 정당들도 집권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우리가 제대로 된 사회·경제·정치 시스템을 만들어두면, 누가 집권해도 나라는 제대로 굴러갈 줄 알았다.

대단한 착각이었다. 경제만 성장시키면 성숙한 사회와 정치가 저절로 따라올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런 일은 없었다. 경제 성장만을 최고의 가치로 삼는 사회에서 역량 있는 민주적 정치세력도, 사회도 성장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돌이켜 생각해보니 이태원 참사가 발생하기 전부터 눈에 보이지 않는 사회·정치 역량을 성숙시키지 않으면 우리 사회가 지속가능하지 않다는 경고음이 계속 울렸던 것 같다. 가깝게는 세월호 참사부터 심각해지는 불평등, 내 권리만 소중하고 나와 내 가족만 잘살면 그만이라는 지독히 이기적인 각자도생의 가치관, 국가와 정치에 대한 엄청난 불신까지 모든 현상이 위험을 경고하고 있었다.

불행한 일은 책임 있는 어떤 정치세력도 이 경고들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아니 받아들일 수 없었을 것이다. 해방 이후 우리에게는 경제 성장과 선진국 진입이라는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뚜렷한 목표가 있었다. 문제는 우리 사회가 그 합의된 목표에 도달하자마자 어디로 갈지 길을 잃었다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선진국을 따라잡기 위해 더 빠른 ‘성장’을 해야 한다는 낡은 목표를 대신할 새로운 대안적 목표가 없었기 때문이다.

새로운 대안적 목표를 만들 수 없었기에 그 누구도 성장제일주의라는 낡은 프레임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러자 유력한 정치세력들은 경쟁적으로 ‘내가 국민을 더 큰 부자로 만들 수 있다’고 외치기 시작했다. 누군가 우리 사회에 대한 근본적 질문을 던지고 성찰을 요구하면, 세상 물정 모르는 한가한 소리라고 치부하기 일쑤였다.

지난 대선을 돌아보면 더 분명해진다. 두 거대 양당이 만든 공약은 그 공약이 “성장과 복지의 선순환”으로 포장되든, “공정성장과 민생안정”이라고 이야기하든 더 많은 풍요를 누리기 위해서 더 빠른 성장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이렇게 우리가 모두 빠른 성장이라는 지나간 옛 노래를 계속 읊조리는 사이, 한국 사회는 전례 없는 위기에 빠져들었다.

지금 우리는 어디에 서 있는 것일까.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대한민국의 2022년을 역사는 어떻게 기록할까. 역사는 2022년을 민주화 이후 “최악의 해” 중 하나로 기록할지도 모른다. 법치(法治)를 가장한 인치(人治)가 민주주의와 등치되고, 공정과 자유를 외치는 정권하에서 부자유와 불공정은 더 심각해졌다. 그리고 서울 한복판에선 무고한 많은 시민이 무책임한 국가 때문에 유명을 달리하는 참사가 벌어졌다.

경제만 성장한 이상한 후진국, 대한민국이 걸어왔던 길에 대한 냉정한 성찰이 필요하다. 물질적 풍요가 전부가 아니라는 것이, 사회 역량의 성숙과 그 사회를 이끌어갈 역량 있는 민주적 정치세력의 성장 없이는 국민의 삶을 안전하고 행복하게 만들 수 없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최악의 2022년, 우리가 어디로 어떻게 가야 할지 사회적 논의를 시작하자. 허울뿐인 선진국이라는 껍데기는 버리고 이제 국민이 안전하고 행복한 나라를 만드는 새로운 역사를 다시 써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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