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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코쿤족의 전화 예절 [이주은의 유리창 너머]

등록 2022-11-20 19:28수정 2023-07-03 15:31

살바도르 달리, <가재 전화기>(Lobster Telephone), 1936, 스틸, 석고, 고무, 레진, 종이 등 혼합재료, 17.8×33×17.8㎝, 테이트모던 미술관, 런던. ©살바도르 달리, 갈라-살바도르 달리 재단.
살바도르 달리, <가재 전화기>(Lobster Telephone), 1936, 스틸, 석고, 고무, 레진, 종이 등 혼합재료, 17.8×33×17.8㎝, 테이트모던 미술관, 런던. ©살바도르 달리, 갈라-살바도르 달리 재단.

[이주은의 유리창 너머] 이주은 | 미술사학자·건국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레스토랑에서 종업원이 통째로 삶은 바닷가재 한 마리를 접시에 담아 어떤 신사의 테이블에 놓는다. 그는 물끄러미 요리를 쳐다보다가 어떤 용무가 떠오른 듯, 바닷가재의 등을 한 손으로 붙잡고 대가리는 자기 귀에, 꼬리 부분은 입에 가까이 대더니 통화를 시작한다. 스페인의 초현실주의 미술가 살바도르 달리(1904~89)의 1936년 작품, <가재 전화기>를 보고 상상해 본 장면이다. 전화기와 바닷가재의 기묘한 결합으로 이루어진 이 작품은 언뜻 사차원의 코미디 주인공 ‘미스터 빈’을 위한 소품처럼 보일 수도 있다.

달리를 비롯한 초현실주의 미술가들은 19세기 시인 로트레아몽의 시적 표현인 “해부대 위에서 우산과 재봉틀이 만나는 것”에서 창작의 영감을 얻었다. 해부대에는 시체가 있어야 하는데, 난데없이 왜 우산과 재봉틀인가. 이는 무슨 의미가 있다기보다는 어울리지 않는 것을 함께 붙여놓음으로써 우리를 색다른 경험의 세계로 인도하려는 로트레아몽의 시 쓰기 방식이다. 달리는 성질이 서로 어긋나는 것들이 예기치 않게 합해지면, 현실의 논리는 위반하겠지만, 어쩌면 다른 차원의 현실에 도달하리라는 생각으로 <가재 전화기>를 만들었다.

본래 이 작품은 영국의 시인이자 미술품 수집가 에드워드 제임스를 위해 달리가 특별히 제작한 감각적인 한 편의 시 같은 전화기였다. 제임스가 일상의 권태에 맴돌지 않고 수화기를 들 때마다 경이로운 시적 발상을 떠올릴 수 있도록 말이다. 시인에게는 감각을 일깨우는 효과가 있을지 모르지만, 그런 자극이 누구에게나 필요한 것은 아니다. 안정된 분위기를 깨고 싶지 않거나 낯선 상황을 즐기지 않는 사람이라면 가재 껍데기가 씌워진 수화기를 보고 섬뜩하고 이질적인 느낌이 들 수도 있다.

자기만의 익숙한 공간 속에서 안분지족하려는 사람들을, 누에고치(cocoon) 안에서 산다는 뜻으로 코쿤족이라고 부른다. 코쿠닝(cocooning)을 즐긴다는 말은 이미 1990년대에 등장했지만, 최근 3년간 코로나19의 전파로 인해 타인과의 접촉이 줄고 일상생활이 크게 변화하면서 첨예화됐다. 이 부족은 각양각색의 사람들과 같이 지내는 것 자체에 큰 의미를 두지 않으며, 타인의 생활방식에 적응하느라 들이는 에너지를 소모적이라고 받아들인다. 각자 간섭받지 않는 여유로운 시간을 최상의 가치로 존중하는 코쿤족 친구에게 전화 걸기는 조심스럽다.

전화벨이 울린다는 것은 즉시성과 긴박함을 전제로 한다. 회사에서 부재중인 나를 황급히 찾는 것은 아닌지, 가족 중 누군가가 사고로 다친 것은 아닌지, 평소에 잠들어있던 초조함이 벨이 울리는 몇 초 안에 극대화된다. 통화가 연결되는 순간 우리는 조금 전까지 몰입하던 일을 멈추고 전화 속 상대방이 언급한 내용 속으로 마음의 준비도 없이 바로 내던져진다. 문자메시지나 전자메일을 받은 경우는 열어보고 답장하기까지 어느 정도 생각할 시간을 가질 수가 있다. 그러나 전화는 대부분 글로 쓰기 어려운 복잡한 상황인 데다가, 즉각적인 결정까지 요구된다.

“상의드릴 일이 있어요. 괜찮으신 시간에 통화하고 싶습니다.” 요즘엔 이런 문자를 종종 받는다. 마치 예전에 누구 집을 방문할 때 사전에 시간을 여쭙는 것처럼, 이제는 통화를 위해서도 미리 예보가 필요해진 듯하다. 무단침입을 원치 않으니, 쌍방이 준비된 자세로 대화하자는 의도에서다. 굳이 번거롭게 통화를 사전 예약하기보다는, 수신자가 원할 때만 오는 전화를 받으면 간단하지 않을까. 그러나 전화를 받지 않을 권리는 아무나 누리는 것이 아니다. 가령 음악회에서 조용히 감상하고 있거나 집에서 휴식을 취할 때 혹은 자연 속을 여행하는 중에도 업무 전화의 습격을 피할 수 없다면, 그는 위계 구조 속에 있는 사람이다. 전화의 전원을 꺼둘 수 있는 높은 위치의 소수와 늘 벨과 진동음에 신경을 곤두세워야 하는 하단부의 다수 사이에는 불평등이 존재한다.

엊그제 옛 제자의 소식이 문득 궁금해져서 전화나 해볼까 하다가 관두었다. 내 번호를 보고 뭔 일인지 화들짝 놀라 잠시나마 허둥거릴 그가 안쓰러웠기 때문이다. ‘안부를 전하고 싶은데, 통화하기 편안한 시간을 알려주세요’라고 문자를 보내면 어떨지 잠시 고민해봤다. 싱거워서 웃음이 나왔다. 앞으로 안부 전화의 미덕은 차차 사라질 것 같다. 뜬금없이 정적을 깨며 잘 지내냐고 묻는 일이 상대에게는 마치 가재 수화기를 잡은 듯 생경한 긴장감을 유발할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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