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 제천시 덕산면 제천간디학교 입구. 제천/이정용 선임기자 lee312@hani.co.kr
[세상읽기] 이병곤 | 제천간디학교 교장
한별은 졸업 직후인 2016년, 자기 질문에 대한 답변 수단으로 ‘공부’를 선택했다. ‘대안대학 지순협(지식순환사회적협동조합)’에서 인문학을 배운다. 자신이 누구이고, 잘 산다의 의미가 무엇인지 찾고 싶었다.
한별은 대안대학 지순협에서 철학자 앨프리드 노스 화이트헤드의 사상을 중심으로 졸업논문을 쓴다. 그 과정에서 자신이 안고 있던 문제의 본질을 발견했다. 제천간디학교를 졸업하고 나니 재학 시절 익숙했던 대안적인 가치들이 ‘단추만 누르면 꺼지는 텔레비전 화면처럼 내 삶에서 자취를 감추는 현상’에 의문을 품고 있던 터였다. 원인은 생태라든가 평화 같은 거대 담론과 가치를 당위로만 받아들인 탓에, 그것을 자기 관점에서 소화하고 삶과 연결 지으려 시도하지 못한 데 있었다.
대안대학을 마친 동학들과 독립 작업자 모임 ‘삼색불광파’를 만들었다. 공부했던 내용을 자기 언어로 표현하고픈 청년들의 욕구가 컸다. 이들을 받아 줄 제도나 발표의 장이 없었기에 저널 하나를 만들어보자는 데 의기투합했다. 집필, 편집, 출판, 홍보까지 나눠 맡았다. 이 과정을 거처 <삼합–스스로 생각한다는 것> 창간호가 탄생했다. 한별은 질문을 던지며 자기를 발견하는 과정에서 청년들끼리 서로 지지해줄 수 있다는 사실을 체득한다.
정치 관련 스타트업 회사에서 3개월간 짧은 인턴을 할 때였다. ‘생존’을 위해 자기 능력을 팔아야 하는 세상을 그곳에서 처음 겪는다. 회사 대표가 “당신의 스페셜티(specialty·특기 또는 전공)는 뭐예요?”라고 물었을 때 별은 “말문이 턱 막혔다”. 자신의 부족함을 스스럼없이 드러내고, 다른 이들의 도움과 협력으로 함께 성장했던 문화의 바깥에서 처음 마주친 당혹감이었다.
제주도에서 열린 워크숍 참여가 평화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졌다. 첫 직장을 평화 관련 단체에서 시작하게 된 계기다. 한별은 평화를 주제로 책방 운영, 교육과 문화프로그램 기획, 평화여행 매니저까지 맡아 해봤다. 2년간 일하면서 돈을 많이 버는 직업보다 지향성 맞는 동료들과 함께 일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올해부터는 ‘자체 방학’을 선언했다. 제천시 덕산면으로 돌아온 것이다. ‘나’다운 모습을 잃지 않고 살 수 있을지, 도대체 ‘나’답다는 것은 무엇인지 한별에겐 여전히 불투명하지만 말이다. ‘시골 언니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여성 청년 열다섯명을 시골로 초청해 5박6일간 캠프를 열었다. 안전하고 평등한 관계 속에서 각자 지닌 고민 나누기를 펼쳐갔다. 학교를 졸업한 이후 ‘공동체’라는 말만 들어도 진저리를 쳤건만, 어느새 한별은 도시 바깥의 삶을 꿈꾸는 여성 청년들과 느슨한 공동체를 만들고 있었다.
사회에서 살아보니 ‘개인의 행복이 가장 중요하다’라는 메시지를 학교가 다양한 방법으로 전해줬다는 사실을 새삼 알게 됐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한별은 자기 삶을 스스로 설명할 수 있으면 괜찮을 것 같다고 생각한다. 서로를 존중하고, 자신도 존중받는 느낌을 가지면서 고민을 함께 나눌 사람들과 동행하고 싶다. 이러한 실존적 판단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사회적 경험을 거쳤다. 학생 혼자 교내에서 상상만으로 자기 진로를 결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고학년 담임을 여러차례 맡았던 우리 학교 김정환 선생은 말한다. “외부 사람들은 우리 졸업생들의 진로가 무엇인지 자주 묻습니다. 우리 아이들 직업이 뭔지 궁금한 것이죠. 항상 대답하기 어려웠어요. 속으로 ‘어쩜 저렇게 단순하게 물을 수 있지?’ 되물었어요. 그분들 질문 자체가, 별이처럼 없는 길 내느라 애쓰고 있는 청년들의 삶에 대한 모독이 아닐까 하는 느낌마저 들었습니다.”
편안한 삶을 살려고 현재의 고통을 참으면서 미리 준비하는 행동을 진로 선택이라고 보지 않는다. 나아갈 진(進), 길 로(路). 자기 판단과 선택에 따라 삶을 육중하게 움직여가는 방향이 곧 진로다. 환갑을 바라보는 나도 여전히 이 질문을 던지면서 산다. 어떻게 하면 좋은 삶을 살아낼 것인가? 각자의 삶을 살면서 이 질문에 정직하게 답변하도록 안내하는 과정이 곧 진로교육이다. 통장 잔액은 아슬아슬하고 미래는 불안한데, 그래도 좋은 삶을 포기할 수 없기에 여러 갈래로 난 길을 헤매면서 창조적 모색을 하고 있는 우리 시대의 ‘숱한 한별들’에게 존경과 찬사, 그리고 지지하는 마음을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