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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김봉규의 사람아 사람아] 밀림을 잡초밭으로 만든 전쟁의 광기

등록 2022-11-15 18:11수정 2022-11-15 19:01

제노사이드의 기억_베트남
부서진 탱크 안쪽에는 바람에 날려온 꽃씨들이 뿌리를 내려 들꽃이 피어있었다. 지금은 들꽃들까지 품어 안은 무쇠로 만든 탱크가 전쟁 때는 얼마나 많은 사람의 생명을 앗아갔을까 생각하니 마음이 무거웠다. 젊은이들이 그런 전쟁의 흔적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있었다.

베트남 전쟁 당시 남·북 비무장지대(DMZ) 남쪽에 인접해 있는 케산지역에는 미 해병대와 남베트남군 기지가 있었다. 고지대여서 주변 전투현장을 내려다볼 수 있는 지정학적 요충지여서, 미군은 케산 기지를 북베트남군의 공격으로부터 방어하기 위해 16만발의 각종 포탄과 9만8721t의 폭탄을 케산지역에 쏟아부었다. 울창했던 밀림은 사라지고 전쟁이 끝난 지 37년이 흐른 지난 2012년 9월에 찾았을 때도 들판에는 나무 몇그루와 잡초가 땅을 메우고 있을 뿐이었다. 베트남 꽝찌성 케산/김봉규 선임기자
베트남 전쟁 당시 남·북 비무장지대(DMZ) 남쪽에 인접해 있는 케산지역에는 미 해병대와 남베트남군 기지가 있었다. 고지대여서 주변 전투현장을 내려다볼 수 있는 지정학적 요충지여서, 미군은 케산 기지를 북베트남군의 공격으로부터 방어하기 위해 16만발의 각종 포탄과 9만8721t의 폭탄을 케산지역에 쏟아부었다. 울창했던 밀림은 사라지고 전쟁이 끝난 지 37년이 흐른 지난 2012년 9월에 찾았을 때도 들판에는 나무 몇그루와 잡초가 땅을 메우고 있을 뿐이었다. 베트남 꽝찌성 케산/김봉규 선임기자

베트남 전쟁 때 최대 격전지 케산(Khe Sanh)을 찾아가기 위해 2012년 베트남이 자랑한다는 하노이와 호찌민(사이공)을 잇는 1726㎞ 길이 일명 ‘통일열차’에 몸을 실었다. 기차 속도가 느려 창밖에 펼쳐진 농촌 풍경을 감상하기에 편했지만, 여기저기서 카드놀이가 벌어지더니 이들이 내뿜어내는 담배연기로 금세 객차 안이 가득 찼다. 밤이 되자 엄지손가락보다 큰 검붉은 바퀴벌레가 발등과 창에 기댄 팔꿈치 옆을 수시로 스쳐 갔다. 그렇게 통일열차에서 하루를 보내고 하노이와 호찌민 중간쯤인 후에(Hue)역에서 내려 광찌성 케산 전투현장으로 이동했다.

케산 전투지역은 전쟁 전에는 소수민족들이 화전을 일구며 사냥과 낚시 등으로 평화롭게 살아가던 밀림이었다. 호랑이와 코끼리도 살았단다. 그랬던 정글이 2차 세계대전 이후 가장 치열한 전선 한복판이 됐다. 해발고도 450m로 주변 평원지대를 한눈에 살피면서 주변을 장악하고 경계할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였기 때문이다. 미군은 네이팜탄과 화학무기 등으로 이곳 밀림을 제거하고 시야를 확보했다. 현지 가이드가 설명했다. “미군은 이곳에 10만t의 폭탄을 퍼부었다. 히로시마에 투하했던 원자폭탄보다 몇배 더 큰 위력이다. 미군과 연합군 3000여명, 북베트남군 1만여명 그리고 엄청난 수의 민간인들이 희생됐다. 지금은 아무것도 남은 게 없다.”

울창했던 밀림은 텅 빈 들판으로 변했고, 나무 몇그루와 잡초가 자리하고 있을 뿐이었다. 전쟁이 끝난 지 37년이 흘렀지만, 아직도 땅을 파면 각종 탄피가 나온다고 했다. 실제 마을주민들은 땅에서 캐낸 탄피, 군복에서 떨어져나온 부대 마크나 라이터 등을 팔고 있었다. 미군이 철수하며 남긴 M48 탱크도 언제라도 굉음과 함께 포탄을 뿜어낼 것만 같았다. 까치발을 한 채 포탄이 발사되는 포문 끝 구멍에 카메라를 들이대고 사진찍는 이들을 보노라니, 왠지 모를 슬픔과 알 수 없는 서늘함이 느껴졌다. 한쪽 편 부서진 탱크 안쪽에는 바람에 날려온 꽃씨들이 뿌리를 내려 들꽃이 피어있었다. 지금은 들꽃들까지 품어 안은 무쇠로 만든 탱크가 전쟁 때는 얼마나 많은 사람의 생명을 앗아갔을까 생각하니 마음이 무거웠다. 젊은이들이 그런 전쟁의 흔적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있었다.

베트남 전쟁에서는 전투 중 민간인 희생은 물론 무장 군인들에 의한 민간인 학살이 있었다. 미군에 의한 학살로는 1968년 무차별 총기난사 등으로 단 몇시간 만에 어린이와 여성을 포함해 347명(미군 추산)~504명(베트남 추정)가량이 희생된 ‘미라이 학살’이 대표적이다. 1년 뒤 언론보도로 당국의 진상조사가 시작됐고, 결과가 나오자 전 세계가 충격을 받았다. 미국 내 반전여론도 확산했다. 하지만 책임자 처벌은 소대장 한명이 유죄(종신형) 판결을 받는 것에 그쳤고, 그마저도 곧 풀려났다.

한국군에 의한 퐁니-퐁넛마을 학살사건도 있다. 미라이 학살보다 한달가량 앞선 1968년 2월12일 베트남 꽝남성 디엔반현 작은 마을에서 해병대(청룡부대)의 학살로 주민 70여명이 희생된 사건이다. 1990년대 후반 <한겨레>, <한겨레21>은 이 문제를 집중 보도했는데, 고엽제후유의증전우회 회원 2200여명이 “‘베트남 참전군인에 의한 베트남 민간인 학살’ 지속적인 보도가 고엽제 손해배상 소송 재판에 나쁜 영향을 주고 있다”며 2000년 6월27일 서울 한겨레신문 본사 앞에서 시위를 벌였다. 일부 회원은 본사 건물로 난입해 시설을 부시고 직원들을 폭행하기도 했다. 당시 본사 3층에서 300㎜ 망원렌즈로 이들의 난동을 기록하고 있었는데, 군복을 입은 한 참전군인이 확성기로 “우리를 찍는 너는 밤길 조심하라”고 말한 게 아직도 귓전에 생생하다. 퐁니-퐁넛 학살사건 생존자들은 한국 정부를 상대로 손해배상청구 소송을 제기했고 지난 8월 서울중앙지법 공판에서 당시 상황을 증언하기도 했다.

세월이 흐르고 시대가 변했지만, 전쟁이 있는 곳에선 여전히 민간인 희생자들이 나온다. 올해 2월 러시아의 침공으로 시작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서도 그런 소식이 들려온다.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 인근 북서부 부차 등 러시아군이 점령했던 도시들에서 대규모 집단무덤이 발견되는 등 민간인 학살 정황이 나왔단다. 이런 비극은 왜 반복돼야 할까. ‘상대를 굴복시키기 위해 무제한으로 폭력을 쓰는 행위’(클라우제비츠 <전쟁론>)가 그 본질인 전쟁에서 인류애나 온건함 등을 바라는 건 무모한 일인지 모른다. 결국 어떤 이유에서든 전쟁은 일어나지 말아야 한다. 좋은 전쟁은 없다.

김봉규 | 사진부 선임기자
다큐멘터리 사진집 <분단 한국>(2011), <팽목항에서>(2017)를 출간했다. 제주 4·3 학살 터와 대전 골령골을 비롯해 전국에 흩어진 민간인 학살 현장을 서성거렸다. 안식월 등 휴가가 발생하면 작업지역을 넓혀 캄보디아 ‘킬링필드’를 비롯한 아시아, 폴란드 전역과 독일, 네덜란드, 체코, 오스트리아 등 나치 시절 강제 및 절멸수용소 등을 15년 넘게 헤매고 다녔다.

bong9@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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