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읽기] 이강국 | 리쓰메이칸대 경제학부 교수
미국 금융언론 <블룸버그>는 지난달 29일 ‘금융위기의 유령이 한국 경제를 휩싸고 있다’는 기사를 내보냈다. 1997년 말 외환위기 직전 한국의 가용 외환보유고가 20억달러에 불과하다고 보도해 ‘위기의 방아쇠’를 당겼던 그 언론사다. <블룸버그>는 한국 금융시장에서 지난 3개월 동안 AAA등급 회사채 금리가 크게 높아졌으며, 기업어음 금리는 13년 만에 최고를 기록했다고 보도했다.
이러한 자금시장의 혼란은 정치인 리스크와 관련이 크다. 9월28일 김진태 지사가 강원도가 보증한 부채 2050억원을 갚지 않기 위해 레고랜드 개발 주체인 강원중도개발을 회생신청하겠다고 해 시장에 충격을 줬기 때문이다. 안 그래도 한국은행의 지속적인 금리인상으로 자금시장의 어려움이 커지고 있던 때였다. 게다가 한국전력은 엄청난 적자를 메꾸기 위해 채권을 계속 발행해 시장에서 자금을 쓸어갔다. 신뢰도가 높은 한전채는 올해 현재까지 발행액이 지난해의 2배가 넘는 약 24조원에 달한다.
이런 상황에서 강원도의 결정은 자금시장 위기에 불을 질렀다. 지방정부의 지급보증마저 믿을 수 없게 되자 투자자들은 패닉에 빠졌고 채권 금리가 치솟았다. 특히 부동산개발에서 사용되는 단기자금 조달 방식인 프로젝트파이낸싱-유동화증권시장이 큰 혼란에 빠졌다. 언론 보도를 보면, 이런 증권은 연말까지 34조원이 만기인데, 특히 레고랜드 사태 이후 건설회사들과 프로젝트파이낸싱에 많이 노출된 중소형 증권사들의 어려움이 심각해졌다.
결국 정부는 지난달 23일 자금시장 경색을 막기 위해 약 50조원 규모의 지원책을 발표했고 한국은행은 대출 때 담보로 인정되는 증권의 범위를 확대했다. 정부 대책은 채권시장안정펀드 20조원, 회사채와 기업어음 매입 프로그램 16조원, 유동성 부족 증권사 지원 3조원, 그리고 프로젝트파이낸싱 사업자 보증 10조원 등을 포함하고 있다. 그러나 신용도 높은 대기업들도 회사채 발행에 실패하고 한전채마저 5.9% 금리에도 발행 목표를 채우지 못하는 등 ‘돈맥경화’는 쉽게 진정되지 않고 있다. 실제로 회사채와 국고채의 금리 차(회사채 신용스프레드)는 지난 11일 157.4bp(1bp=0.01%포인트)로 글로벌금융위기 때인 2009년 4월 이후 최고치를 기록했다.
위기를 불러온 김진태 지사는 45일 만에 사임한 영국의 트러스 전 총리를 연상케 한다. 지난 9월 총리에 취임한 트러스가 감세정책을 무리하게 밀어붙이자 재정적자를 우려한 투자자들이 영국 국채를 대거 매각했고 국채 금리가 급등했다. 결국 영국 중앙은행은 국채를 매입하는 양적완화 정책을 다시 도입해 급한 불을 껐다. 김진태 지사는 그의 결정에 관해 기획재정부와 사전에 협의하지 않았고, 이후 혼란에도 경제부처는 강원도와 협의 없이 뒤늦게 대응책을 내놨다.
한편 지난 1일 흥국생명이 5억달러 영구채의 콜옵션 행사를 취소해 금융시장에 또 다른 충격을 줬다. 신종자본증권이라 불리는 영구채는 원금 상환 없이 이자만 영구히 지급하는 채권이지만, 5년 뒤 콜옵션 행사로 매입해 자금을 갚는 것이 일반적이다. 흥국생명은 이를 위해 새로운 영구채를 발행하려 했지만 10% 금리에도 투자자를 찾기 힘들자 콜옵션을 행사하지 않고, 6.7%로 높아진 금리를 지급하는 것이 합리적이라 판단했다.
그러나 이는 국제금융시장에 사실상 채무불이행으로 받아들여졌다. 이 결정 이후 대외신인도를 나타내는 시중은행의 신용부도스와프(CDS)프리미엄이 급등했고, 국제 신용평가기관인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는 한국 보험사들의 자금조달 여건이 악화할 것이라는 전망을 내놨다. 금융당국은 흥국생명의 결정을 두고 가능한 선택지라며 방관했다. 정부는 후폭풍을 예상할 수 있음에도 대응하지 못했고, 상황이 악화되자 부랴부랴 보험업 감독규정을 과감하게 유권해석해 결국 흥국생명이 콜옵션을 행사하도록 했다.
레고랜드와 흥국생명 사태는 금리가 높아지는 시기에 나타날 수 있는 금융시장 혼란을 막기 위해 정부가 언제나 깨어 있고 또 신속하고 적극적으로 대응해야 함을 시사한다. 우리 정부는 과연 어떤가. 얼마 전 대통령은 언론에 생중계되는 비상경제민생회의를 개최했지만, 경제 활성화를 위한 정책을 나열하는 데 그쳤을 뿐이다. 정부는 말로만 비상이라고 할 게 아니라, 금융시장과 국민의 삶 모두 불안불안한 진정한 비상 상황임을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레고처럼 공들여 쌓은 경제도 무너지는 것은 한순간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