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8월17일 헝가리 수도 부다페스트에서 시민들이 가스·전기 가격이 급등한 가운데 땔감 수요를 충족하기 위해 벌목 규정을 완화한 것에 항의하는 시위에서 빅토르 오르반 총리를 풍자한 펼침막을 들고 있다. 헝가리는 유럽연합(EU)과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회원국이지만 극우 성향의 오르반 총리는 친러시아 노선을 걷고 있다. AP 연합뉴스
[세상읽기] 김공회 | 경상국립대 경제학부 교수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전쟁이 장기화하면서 서방의 대러 제재와 러시아의 에너지 무기화가 서로 첨예하게 날을 겨누고 있다. 이런 고래 싸움에 등짝이 터지는 것은 언제나 보통 사람들이다. 치솟는 에너지 가격에 저항하는 시위 소식이 끊이지 않는 게 그 증거다. 그런데 이는 대개 프랑스나 독일처럼 우리에게 친숙한 서유럽 얘기다. 더 힘든 겨울을 앞두고 있지만 우리에겐 좀처럼 소식이 전해지지 않는 사람들도 있다.
유럽이 탄소중립 움직임에서 앞서 있기는 하지만, 이는 에너지 특히 천연가스 수입에 의존한 결과이기도 하다. 2020년 기준 유럽의 에너지 수입 의존도는 57.5%에 이른다. 세분화하면 석탄 등 고체화석연료의 수입 의존도는 35.8%, 원유와 천연가스는 각각 97.0%와 83.6%다. 수입처 다변화 노력에도 불구하고 유럽은 2020년 기준 수입된 석탄의 49.1%를 러시아로부터 들여오고 있다. 천연가스와 원유는 각각 38.2% 및 25.7%다. 러시아가 ‘배짱’을 부리는 근거다.
그런데 유럽이라고 다 같진 않다. 세계금융위기 이후 독일 등 북유럽과 그리스 등 남유럽 사이 격차가 한동안 화제였지만, 2000년대 이후 옛 소련과 강하게 연계돼 있던 동유럽 나라들이 대거 유럽연합(EU)에 가입함에 따라 동서 사이 격차도 그에 못지않다.
이런 차이는 최근 러시아발 에너지 위기 속에서 특히 도드라진다. 먼저 경제력에 따라 각국이 에너지 위기에 대응하는 ‘맷집’이 큰 틀에서 결정될 것이다. 당연히 가난한 나라가 더 힘들다. 다음으로 나라마다 에너지를 조달하고 소비하는 방식도 천차만별이다. 가장 문제가 되는 천연가스만 보자. 2020년 유럽 전체의 러시아 의존도가 38.2%이지만, 나라별로는 프랑스처럼 의존도가 20% 미만인 곳이 있는가 하면 라트비아, 북마케도니아, 몰도바 등은 수입되는 천연가스 전량이 러시아산이다. 헝가리나 체코도 천연가스 수입의 95% 이상을 러시아에 의존하고 있다.
그러니 유럽 각국이 러시아에 대한 경제 제재를 대하는 처지가 똑같을 수는 없을 것이다. 실제로 대러 제재를 논의하는 과정에서 동유럽 나라들은 ‘다른 목소리’를 내고 있다. 이들은 러시아 제재에 유예 기간을 둘 것을 요구하기도 했고, 지난 9월 헝가리의 빅토르 오르반 총리는 대러 제재 철폐를 주장하기도 했다. 이 사례는 옛 사회주의권 나라들의 반유럽 정서, 그리고 유럽연합의 제도적 취약성 및 비민주성을 드러내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그것을 정치 차원에서만 볼 건 아니다. 유럽의 대러 제재를 통해 가장 혹독한 겨울을 보내야 할 이들이 동유럽 각국 국민임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가난해서 힘들고, 러시아 의존도가 높아서 힘들다.
외신들로부터 전해지는 동유럽의 실상은 처참하다. 이미 헝가리는 에너지 절약을 이유로 도심 대형 호텔에서부터 전국의 체육관, 극장, 박물관, 도서관에 이르는 공공시설을 폐쇄하고 있다. 체코에서는 정치인들이 국민에게 스웨터 입기를 권장하는 한편 학교에서는 학생들에게 담요를 나눠 주고 있다고 한다. 일부 지역에서는 이미 폐쇄된 화석연료 발전소를 재가동하고 있는데, 가장 질 낮은 종류의 석탄인 갈탄이 그 주요 연료로 쓰이고 있다.
이런 조치들에도 불구하고 치솟는 에너지 가격을 감당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스스로 해결책을 구할 수밖에 없다. 지난달 말 영국 <파이낸셜 타임스>는 한 기사에서 그 충격적인 실상을 상세히 전한 바 있다. 여기엔 갈탄부터 낡은 축구화, 온갖 쓰레기까지 온기를 유지하기 위해서라면 뭐든 태우는 헝가리 한 중년 남성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그의 행위 상당 부분은 불법이지만, 이런 행위가 대중 사이에서 만연하면 마냥 그것을 불법으로 낙인찍을 수만도 없다. 실제로 헝가리 총리는 벌목 규제를 완화함으로써 불법의 현실을 일부 용인할 수밖에 없었고, 폴란드의 여당 지도자는 아예 자국민들에게 ‘타이어 빼고 뭐든 태우라’라고 권고했다고 한다.
올해 러시아의 ‘도발’이 기후위기 대응 움직임에 재를 뿌렸다는 비판이 흔히 들린다. 그런데 이런 동유럽 국가들의 사례를 보면, 그것이 후퇴시키고 있는 것은 인류문명 자체가 아닌가도 싶다. 하지만 동시에, 여기에 등장하는 이들은 애초 ‘정의로운 전환’에서도 뒤처져 있는 사람들이다. 이번 후퇴가 좀 더 포용적인 전환을 고민하는 계기라도 됐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