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당시 전 검찰총장)이 ‘전두환 옹호’ 발언에 대해 사과한 뒤 지난해 10월22일 새벽 자신의 반려동물 관련 인스타그램에 올린 사과 사진. 애완견 토리에게 사과를 주는 모습이다. 현재는 계정 자체가 없어진 상태다. 인스타그램 갈무리
[삶의 창] 이명석 | 문화비평가
언젠가 일본 도서관에서 글쓰기에 관한 책들을 들춰봤다. 나도 글쓰기를 가르치는 입장이라 비법이라도 있을까 기대했으나 대체로 뻔한 내용이라 빠르게 책장을 넘겼다. 그러다 어느 책의 마지막에 실린 응용편에 눈이 멎었다. ‘사죄문 쓰기.’ 그래, 정말 중요한 과제다. 사과라는 행위 자체도 어렵지만 그것을 글로 전하기란 더욱 힘들다. 특히 평소에 글 한쪽 안 써본 이들에겐 고역 중의 고역이리라.
그때부터 나는 사과문에 특별한 관심을 기울였다. 글쓰기를 가르칠 때 좋거나 나쁜 예로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사례는 넘쳐났다. 손님을 잘못 응대한 식당 주인, 열성 팬을 뒤에서 모욕한 연예인, 대형 참사를 방치한 공무원 등등. 방식도 다양했다. 업주는 다급함이 묻어나오는 손편지, 교수는 넘치는 학식을 주체 못하는 입장문, 기업은 변호사의 따가운 눈을 통과한 사과문을 내놓았다. 그런데 참 묘했다. 모두가 짠 듯이 비슷한 단어, 어투, 논리를 담고 있었고, 하나같이 나쁜 글쓰기의 전형이라 할 만했다. 특히 다음과 같은 문구나 표현을 자주 만났다.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사과문의 단골손님, 하지만 가장 안 어울리는 말이다. 사과란 무엇인가? 피해자가 당한 고통이 나에게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일이다. 그런데 이유를 막론하다니 이런 속내는 아닐까? ‘내가 변명할 여지도 많고, 따지고 보면 그렇게 잘못했나 싶지만.’ 이 못난 말과 자주 어깨동무를 하고 나오는 말이 있다. ‘잘잘못을 떠나.’ 이건 더 노골적이다. ‘내가 사과를 해줄 테니, 잘하고 못하고는 다 묻어버리자.’
‘~한 부분.’ 언젠가부터 우리말을 오염시키고 있는 ‘부분, 측면, 구석’ 같은 말이 나오면 일단 의심해야 한다. 가령 ‘제가 때렸습니다’라고 하면 되는데, ‘신체적 접촉이 발생한 부분이 있었습니다’라고 한다. ‘미안하다’고 할 일을 ‘그건 내가 미안한 부분이야’라고 말한다. ‘사은품의 품질이 고르지 못해 고객들의 항의가 발생한 부분이 있었습니다.’ 잘못된 사은품을 만든 책임자는 어디 숨었나? 이 모두가 문장을 복문으로 꼬고 수동태로 뒤집으며 가해자를 은근슬쩍 숨기려는 술책이다. 마치 책임자나 가해자도 그 ‘현상’의 일부분이며, 또다른 피해자라는 듯이.
‘국민 여러분께.’ 가해자를 숨긴 다음엔 피해자를 지운다. 항의와 비난이 쏟아지니 사과하는 시늉은 해야 한다. 하지만 나를 궁지에 몰아넣은 ‘피해호소인’에게는 절대 하고 싶지 않다. 그래서 ‘저를 아끼는 유권자, 팬, 가족, 동종 업종 종사자…’ 나아가 두루뭉술하게 ‘국민’을 소환한다. 이어서 ‘항의전화와 불매운동으로 고통받고 있는 가족, 직원’들에게 사과한다. 그렇게 자신을 피해자로 둔갑시킨다.
‘관행적으로.’ 왜 그랬냐 캐물으면 이렇게 답한다. 이런 뜻일까? ‘전부 다 했는데 왜 나만 갖고 그래?’ 좀 먹힌다 싶으면 음모론을 제기한다. ‘갑자기 여론의 몰매가 쏟아지는 데는 석연치 않은 구석도 있다.’ 아예 자세를 고쳐 앉고 나무란다. ‘이번 일이 우리 사회의 도덕성을 제고하는 기회가 되기를 바란다.’
왜 대부분의 사과문은 이렇게 졸렬할까? 마음에 없는 말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거짓 경력은 쉽게 쓰면서 거짓 마음은 절대 못 쓰는 사람이 있다. 억지로 사과하고 나면 울분을 못 견뎌 개에게 사과를 주는 사진을 찍어 올리기도 한다. 그런데 정반대의 사람이 있다. 마음이 꽉 차 글로 쓰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는 사람. 진실된 피해자의 글은 쉽고 구체적이고 논리적이다. 내가 도대체 어떤 일을 당한 걸까? 혹시 오해한 건 아닐까? 나 같은 피해자를 다시 만들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수만번 곱씹은 생각이 흘러나온 글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