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터뭴러(한국명 홍민) 덴마크 한국인 진상규명 그룹(Danish Korean Rights Group, DKRG) 공동대표가 지난 8월23일 오전 서울 중구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를 방문해 덴마크 해외입양인 인권 침해 조사 신청서를 제출한 뒤 접수증명원을 들어보이고 있다. 뭴러씨를 비롯한 조사 신청인들은 1970년대부터 1990년대 초반까지 덴마크 해외입양인의 입양 과정에서 강압, 뇌물, 문서 위조, 가짜 고아 호적 등 불법 입양의 양상이 나타났다며 조사를 신청했다. 연합뉴스
[세상읽기] 황필규 | 공익인권법재단 공감 변호사
유럽으로 출장을 가게 돼, 덴마크 내 한국계 해외입양인들과 만남을 추진했다. 스무명 넘는 해외입양인들이 함께하는 자리가 마련됐다. 지난 9월 덴마크 해외입양인들이 주축이 돼 전세계 해외입양인 300여명이 자신들의 정체성과 가족관계가 입양 과정에서 허위로 표시됐다며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에 조사를 촉구하는 신청서를 제출했다. 진실화해위는 아직 아무런 소식이 없고, 이들은 조사 개시 소식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다.
한자리에 모인 해외입양인들은 자신들의 이야기를 쏟아냈다. 원가정 의사와 무관하게 입양기관이 자의적으로 입양 절차를 진행한 경우, 원가정이 있는데도 고아 호적이 창설된 경우, 신원 정보가 바꿔치기되거나 뒤바뀐 경우, 입양 관련 기록이 조작된 경우, 입양 과정이 불분명하거나 제3자에 의한 경우, 입양인과 입양가족에 대한 사후 관리가 부재했던 경우 등 다양한 상황들이 얘기됐다. 기존 연구조사가 있어 새로운 내용은 아니었지만, 직접 겪고 ‘생존’한 이들의 목소리로 듣는다는 것은 감당하기 쉽지 않은 경험이었다. 그리고 그런 사례들이 예외적이고 고립된 상황에 관한 것이 아니라 아주 광범하고 일반화된 관행의 연장선에 있음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었다.
최근 아동 권리, 강제실종 관련 유엔인권조약기구와 아동 매매·성착취, 인신매매, 강제실종 관련 특별보고관 등이 관련 인권조약과 권고 내용을 종합해 불법적인 국가 간 입양에 관한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유엔은 피해자의 생명과 권리에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하는 불법 입양이 종종 공무원의 개입이나 국가정책의 결과로 나타남을 강조하며, 불법 입양을 막기 위해 국가가 지켜야 할 최소한의 의무를 다음과 같이 제시하고 있다.
첫째, 모든 입양 과정에서 아동에게 최선의 이익을 가장 중요하게 고려해야 한다.
둘째, 국가 내 다른 대안적 양육 가능성을 충분히 모색하고, 국가 간 입양은 최후의 수단으로만 검토해야 한다.
셋째, 입양 과정을 통한 부적절한 재정적 이득 등을 방지해야 한다.
넷째, 국가 간 입양 관련 주체들의 자격과 동의를 충분히 확인하고 관할 당국을 통해 허가돼야 한다. 특히 고아로 규정된 아동의 배경과 문서는 철저하게 검증해야 한다.
진실화해위 조사 신청 대상이 된 해외입양 사례에서 이런 원칙은 지켜지지 않았다는 점에서 이 유엔 문헌이 시사하는 바가 크다. 또 불법적인 관행이 국가의 조장이나 방조 아래 이뤄졌음을 확인하거나 그랬다고 추정할 수 있는 사실들이 하나씩 밝혀지고 있다. 무엇보다 외국여행도 자유롭지 않았던 시절, 이민은 철저하게 국가정책으로 추진되고 관리됐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 기본법’(진실화해법)에서 조사 대상 요건으로 정한 ‘위법 또는 현저히 부당한 공권력의 행사’가 있었다고 볼 수밖에 없는 이유다.
불법적인 국가 간 입양은 아동에게 중요한 가장 핵심적 권리, 즉 어떠한 차별 없이 가족, 사회, 국가로부터 적절한 보호를 받을 권리, 부모를 알고 부모로부터 보살핌을 받을 권리, 의사에 반하여 부모와 분리되지 않을 권리, 이름·국적·가족관계와 같은 정체성을 보존할 권리, 사생활 보호와 가족생활의 권리를 전면적으로 침해한다.
과거 진실화해위에서 진실규명 조사 결과를 의결한 대부분 사례는 생명이나 신체에 대한 물리적 침해를 전제로 하고 있다. 국가 간 입양은 물리적 침해와는 거리가 있지만, 진실화해법이 사망·상해와 중대한 인권침해를 구별하고 있다는 점, 불법 입양이 초래하는 인권침해가 심각하고 광범위하다는 점에 비춰 불법 입양이 진실화해법에서 규정한 ‘중대한 인권침해’에 해당한다는 점은 이론의 여지가 없다고 봐야 한다.
상당수 해외입양인은 자신의 정체성을 박탈당하고 자신의 것이라고 생각했던 정체성이 그렇지 않음을 알게 되는 과정을 겪은, 중대한 인권침해의 생존자들이다. 그리고 아직도 자신의 정체성을 찾는 생존의 과정에 놓여 있다. “나는 누구입니까”라는 질문을 던지는 이들은 어설픈 위로의 답을 듣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진실을 알 권리 보장, 기존 해외입양 과정에 개입한 정부와 관련 민간기관에 대한 철저한 조사, 그리고 이런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게 만든 국가와 사회 시스템에 대한 뼈아픈 반성과 성찰이 그 답을 찾기 위한 첫걸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