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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완전한 소모

등록 2022-10-27 18:31수정 2022-10-28 02:37

쇠렌 키르케고르(1813~1855). 위키미디어 코먼스
쇠렌 키르케고르(1813~1855). 위키미디어 코먼스

[크리틱] 김영준 | 전 열린책들 편집이사

아이가 태어난 해에 디지털카메라를 샀다. 그때 “못 찍은 사진도 지우지 말 것”이라는 충고를 어디서 읽었다. 그 뒤 사진은 무한히 늘어갔다. 이를 날리지 않기 위해 계속 하드디스크를 추가하고, 이조차 불안해서 외국 백업서비스들을 구독하게 되었다. 그렇지만 사진들을 자주 꺼내 보진 않았다. 올해 시간 여유가 좀 생겨, 거실에 있는 컴퓨터에 가족들 찍은 사진을 전부 복사해 넣고, 24시간 무순서로 재생하게 해놨다. 요즘은 매일 몇십분씩 이를 들여다보는 게 큰 낙이다. 보다 보면 얼마나 많은 물건이 그동안 이사 다녔던 여러 집을 채웠다가 사라졌는지 놀라게 된다. 낯익은 파란색 플라스틱 흔들 목마나, 아이들이 기차처럼 타고 놀던 바퀴 달린 수납함 같은 것이 등장하면 정말이지 마음 한구석을 뭔가가 찌르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이것들을 집에서 치운 것은 10년 전일까? 정확히는 알 수 없다. 이 부재를 기억하는 사진이라도 온전하니 다행일 것이다.

물건을 줄이는 삶, 간소한 삶에 대한 담론은 늘 있었고 대유행이 되기도 했다. 공간은 비울수록 아름답고, 옷은 몇벌이면 충분하고, 매일 물건 하나씩 줄여야 하며, 그게 지구에도 이롭다는 것이다. 과연 삶을 간소화할 수 있는가 하는 근본적인 의문은 접어두자. 이 담론이 다이어트와 똑같은 갈망을 가리키고 있는 것은 명백하다. 나는 이 삶을 지고 가는 것이 힘들고, 새로 시작하고 싶으며, 자신과 주변에 대한 지배력을 회복해야 한다는 것이다. 물건들은 체중이고, 물건이 없거나 버려서 생긴 불편은 배고픔이나 운동의 고통과 등가이다.

그렇지만 간소한 삶과 다이어트의 유사성은 피상적인 데서 그친다. 다이어트는 자기의 지방을 태우지만, 간소한 삶은 물건을 내버릴 뿐이다. 지방은 본래 태우라고 쌓아두는 것이므로, 다이어트는 지방의 본질을 존중하고 목적의 실현을 돕는다고 할 여지도 있다. 물건을 버리는 것은 이와 다르다. 여기에는 일방적인 관계 단절이 있을 뿐 물건의 특성을 존중한다거나 적절한 사용법을 찾아보려는 관심은 들어 있지 않다. 자신이 물건뿐 아니라 다른 대상에도 이런 패턴을 반복하고 있다면, 과연 간소함으로 삶의 변화를 얻을 수 있을지는 회의적이다.

‘우리는 허기진 사람처럼 물건을 사서 공간을 채우므로’ 따라서 ‘뭔가 반대되는 조치가 필요하다’는 고정관념이 생겼다. 진실은, 큰 시간 단위로 보면, 우리가 열심히 버리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공간이 좁아서, 또는 새 물건을 들이기 위해, 또는 심리적, 심미적 이유에서 많은 사물들과 작별한다. 일상이 된 이 ‘버리는 삶’은 삶의 허망함의 주된 원인으로 느껴질 정도이다. 허망함은 정직한 감정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물건과 의미 있는 연관을 만드는 데 실패했고, 물건의 가능성을 완전히 써버리지도 않은 채 버리고 있음을 잘 알고 있으며, 우리가 인생을 다루는 방식도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이미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물건을 끝까지 다 사용했을 때 쾌감이 일어난다고 말했던 스토아 철학자들이 있었다. 예컨대 치약이나 장판 테이프를 끝까지 다 쓰면 우리는 실제로 기쁨을 얻는다. 그게 왜 그렇게 되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러나 이것이 자연스럽고 긍정적인 감정이라는 건 확실하다. 2천년 뒤, 삶의 목적은 자신을 생산하는 것이고 인간은 그것을 완전히 소모해야 한다고 말한 키르케고르도 이와 다른 얘기를 한 것은 아니었다. 자신을 소모할 때 인간은 출발점에 서게 되는 거라고 그는 말하기도 했다. 생각해보면 ‘간소한 삶’의 취지까지 부정할 이유는 없다. 다만 인생의 실마리는 물건을 치우는 쪽보다, 사용 방법을 이해하고 끝까지 써보려고 하는 쪽에 섰을 때 더 찾기 수월해지는 건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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