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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김봉규의 사람아 사람아] 아이들의 학교가 고문과 학살 터가 되었다

등록 2022-10-25 18:34수정 2022-10-26 02:35

제노사이드의 기억 캄보디아 _02
첫번째 건물에 들어서려니 입구에 미소 짓는 사람 얼굴 그림 위에 빨간색 엑스(X) 자 표시가 눈에 들어온다. 관람 도중에는 웃지 말라는 의미였다. 안으로 들어가니 이곳에 끌려왔다 희생된 이들의 얼굴과 학살당한 주검 사진들이 벽면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사진 중에는 갓난아이를 안고 있는 여성도 여럿 보였다.

투올슬렝 수용소는 2014년부터 세번에 걸쳐 찾았는데 마지막으로 들른 2019년 5월에는 구글지도 등을 참고해 주변에서 제일 높은 호텔 꼭대기 방에서 묵었다. 동틀 무렵과 해 질 녘 주변 동네 분위기를 살펴보기 위해서였다. 사진에 해 뜨기 전 투올슬렝 주변 동네 모습을 담았는데, 한가운데 기역(ㄱ) 자로 배치된 낡은 건물이 투올슬렝 수용소다. 모두 5개 건물이 있는데 3개는 주변 건물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 킬링필드 당시 이곳에서는 주검을 처리할 공간이 없어 수감자들은 매일 밤 트럭에 실려 남쪽으로 12㎞ 떨어진 츠엉에크 지역 공터에 끌려가 집단으로 처형, 매장됐다. 프놈펜/김봉규 선임기자
투올슬렝 수용소는 2014년부터 세번에 걸쳐 찾았는데 마지막으로 들른 2019년 5월에는 구글지도 등을 참고해 주변에서 제일 높은 호텔 꼭대기 방에서 묵었다. 동틀 무렵과 해 질 녘 주변 동네 분위기를 살펴보기 위해서였다. 사진에 해 뜨기 전 투올슬렝 주변 동네 모습을 담았는데, 한가운데 기역(ㄱ) 자로 배치된 낡은 건물이 투올슬렝 수용소다. 모두 5개 건물이 있는데 3개는 주변 건물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 킬링필드 당시 이곳에서는 주검을 처리할 공간이 없어 수감자들은 매일 밤 트럭에 실려 남쪽으로 12㎞ 떨어진 츠엉에크 지역 공터에 끌려가 집단으로 처형, 매장됐다. 프놈펜/김봉규 선임기자

캄보디아 수도 프놈펜 시내 주택가 한복판에는 쇠창살과 녹슨 철조망이 여러겹 둘러쳐진 담장 안 3층짜리 회색 콘크리트 건물 다섯개 동이 나란히 서 있다. ‘킬링필드’ 당시 크메르루주군이 운영했던 189개 수용소 가운데 가장 악명이 높아 1만2천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다는 투올슬렝 수용소(일명 S-21)다. 고등학교 건물을 개조한 이곳에서는 ‘노동자와 농민 유토피아 건설’에 반하는 이들로 지목된 사람들이 고문당하고 목숨을 잃었다. 연좌제로 온 가족이 함께 끌려와 희생되기도 했고 외국인도 있었다.

투올슬렝은 박종철 열사 고문치사 사건이 벌어진 남영동 대공분실(1976~2005년, 현 민주인권기념관)을 떠올리게 한다. 서울지하철 1호선 남영역 바로 옆 짙은 회색 벽돌로 지어진 5층짜리 남영동 대공분실은 ‘국제해양연구소’라는 공식 명칭을 내걸고 수많은 재야인사와 운동권 학생들을 고문했던 곳이다. 한국의 대표 건축가인 김수근이 설계했는데, 사무실 공간 창은 통창이지만 조사실 쪽 창문은 세로로 좁고 길게 만들어져(투신을 막기 위해서다) 대조를 이룬다. 1985년 이곳에 끌려와 이근안에게 고문당했던 고 김근태 의원은 훗날 “남영동 5층 구석방에서의 23일, 이것은 지옥이었다. 독가스 대신 전기고문과 물고문이 설치는 나치 수용소였다”고 기록했다.

2014년부터 2019년까지 세번 찾은 투올슬렝 정문 기둥 위에는 ‘Tuol Sleng Genocide Museum’(투올슬렝 제노사이드 박물관)이라는 영어 현판이 크메르어와 함께 걸려 있었다. 마당에는 5층 높이 정도 되는 키 큰 야자수가 건물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첫번째 건물에 들어서려니 입구에 미소 짓는 사람 얼굴 그림 위에 빨간색 엑스(X)자 표시가 눈에 들어온다. 관람 도중에는 웃지 말라는 의미였다. 안으로 들어가니 이곳에 끌려왔다 희생된 이들의 얼굴과 학살당한 주검 사진들이 벽면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사진 중에는 갓난아이를 안고 있는 여성도 여럿 보였다. 나치의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에서 보았던 희생자들 사진이 떠올랐다.

다양한 국적의 관람객들은 통역기 헤드폰을 끼고 더운 날씨에도 수용소 곳곳을 살펴보고 있었다. 가운데는 가족 단위 현지인 관람객도 간간이 보였다. 마당 한쪽에서는 이곳의 생존자(12명) 부 멩과 춤 메이가 관람객을 상대로 자서전(생존기)을 팔면서 관람객들과 함께 기념사진을 찍고 있었다. 부 멩은 폴 포트 초상화를 그릴 수 있어 학살을 면했고, 프놈펜에서 자동차 정비공으로 일했던 춤 메이는 재봉틀을 다룰 줄 알아 크메르루주군 병사들의 옷을 수선하며 살아남을 수 있었다. 무더운 날씨 때문인지 마당 중앙 작은 분수대에서는 아이들 여럿이 물장구를 치며 놀고 있었는데, 고문으로 인해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하늘을 우러러보고 있는 분수대 꼭대기 조형물과 묘한 대조가 됐다. 분수대 옆으로는 희생자들의 이름이 촘촘하게 새겨져 있는 검은색 대리석 여러개가 바닥에 누워 있었다.

투올슬렝 문이 닫힐 무렵 동쪽 하늘에 둥근 달이 떠올랐다. 서둘러 밖으로 나오니, 정문 앞은 동네 주민들의 오토바이 주차장으로 변했다. 투올슬렝 안쪽 조명이 꺼지자 골목길과 주택가 창문들이 하나둘씩 불을 켰다. 집마다 저녁 준비가 한창이다. 더운 여름밤, 몇몇 사람들은 아예 건물 밖에서 생선과 고기를 굽거나 쌀국수를 삶고 있었다. 밥 짓는 냄새가 동네에 퍼지자 강아지들도 연신 짖어댔다. 어느새 직장에서 퇴근한 이들과 하교한 학생들이 야외 밥상을 중심으로 작은 의자에 둘러앉자 오순도순 이야기를 나누며 웃음꽃을 피웠다. 수만명 무고한 인명을 앗아간 현장 바로 옆에서도 서민들의 소박한 삶은 계속되고 있었다.

킬링필드는 40년도 더 된 과거지만, 캄보디아 사회 내면에서 그때의 참혹한 상처가 아문 것은 아니다. 2019년 캄보디아를 찾아 시엠레아프에서 만난 쏙 소파(57)는 “내가 열살 때였다. 군인이던 아버지, 프놈펜에서 교수로 있던 큰오빠와 군인인 둘째 오빠, 그리고 의사인 큰언니 남편, 둘째 언니네 가족, 군인인 큰아버지 가족까지 모두가 잡혀갔다. 살아서 돌아온 사람은 없었고, 주검도 전혀 찾지 못했다”고 말했다. 주변을 둘러보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학살에 가담했던 이들이 이웃에 아직 그대로 살고 있고 서로 모른 체하며 잊은 듯 살고 있다”고 말하던, 회한에 찬 그녀의 표정이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김봉규 | 사진부 선임기자
다큐멘터리 사진집 <분단 한국>(2011), <팽목항에서>(2017)를 출간했다. 제주 4·3 학살 터와 대전 골령골을 비롯해 전국에 흩어진 민간인 학살 현장을 서성거렸다. 안식월 등 휴가가 발생하면 작업지역을 넓혀 캄보디아 ‘킬링필드’를 비롯한 아시아, 폴란드 전역과 독일, 네덜란드, 체코, 오스트리아 등 나치 시절 강제 및 절멸수용소 등을 15년 넘게 헤매고 다녔다.
bong9@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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