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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제품 생산 과정에서의 윤리와 SPC 불매운동

등록 2022-10-24 18:42수정 2022-10-25 02:38

지난 20일 오후 서울 서초구 양재동 에스피씨(SPC) 본사 앞에서 열린 경기 평택 에스피씨 계열사 에스피엘(SPL)의 제빵공장 사망 사고 희생자 서울 추모행사에서 참가자가 손팻말을 들고 있다. 연합뉴스
지난 20일 오후 서울 서초구 양재동 에스피씨(SPC) 본사 앞에서 열린 경기 평택 에스피씨 계열사 에스피엘(SPL)의 제빵공장 사망 사고 희생자 서울 추모행사에서 참가자가 손팻말을 들고 있다. 연합뉴스

[세상읽기] 김만권 | 경희대 학술연구교수·정치철학자

1996년 인도, 말레이시아, 파키스탄, 타이가 미국을 세계무역기구(WTO) 분쟁해결기구에 제소했다. 미국이 이들 국가에서 수출하는 새우를 차별했다는 것이다. 새우를 차별하다니, 이게 무슨 소리인가? 사정은 이랬다.

미국은 멸종위기동물보호법에 따라 멸종위기에 있던 바다거북을 보호하기 위해 1987년부터 미국의 모든 새우 트롤어선에 바다거북이 탈출할 수 있는 장치를 갖춘 어망 설치를 의무화했다. 그리고 1989년에는 바다거북을 보호하지 않는 어망으로 잡은 새우의 수입을 금지하는 법을 통과시켰다. 이에 미국이 설정한 기준을 맞추지 못한 국가들이 동종상품 차별로 제소했던 것이다.

제소국들은 미국이 카리브해 지역 국가들에는 바다거북 친화적 어망을 갖추는 데 기술적·재정적 지원을 했을 뿐만 아니라 아시아 국가들보다 더 긴 전환 시간을 줬다는 점을 지적했다. 그리고 이런 미국의 조처가 동종상품에 대해 회원국을 차별해서는 안 된다는 세계무역기구의 최혜국 대우 원칙을 위반했다고 주장했다. 세계무역기구는 이런 아시아 국가들의 주장을 첫 판정부터 받아들였고 아시아 국가는 상소심까지 연이어 승소했다.

하지만 이 분쟁이 세간의 이목을 사로잡은 건 다른 데 있었다. 바로 바다거북 친화적 어망으로 잡은 새우와 그렇지 않은 새우가 동종상품이냐는 논쟁이었다. 만약 동종상품이라면 미국이 회원국을 다르게 대우할 수 없지만, 다른 상품이라면 다른 조처가 가능했기 때문이다. 이 분쟁 당시만 해도 세계무역기구는 동종상품을 구별하는 데 있어 생산물의 최종 형태만 고려했을 뿐 생산 방식에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있었다. 이런 기조는 당시 분쟁 해결에서도 이어졌다.

이 분쟁에서 터져 나온 동종상품 논쟁이 생소하게 느껴질 수 있지만, 알고 보면 국가 간 힘의 논리를 떠나 무역법이 생산 과정에서 일어날 수 있는 윤리적 위반을 고려할 것인지 그렇지 않을 것인지에 관한 중요한 질문을 담고 있었다. 예를 들어, 강제노동으로 만든 티셔츠와 그렇지 않은 티셔츠는 동종의 상품일까 아니면 서로 다른 종류의 상품일까? 유아노동으로 만든 축구공과 그렇지 않은 축구공의 경우는 어떨까? 만약 우리가 상품의 종류를 결정할 때 생산 방식의 윤리적 측면을 고려하게 된다면 앞의 두 경우 모두 서로 다른 종류 상품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긴 이야기를 꺼낸 것은 바로 에스피씨(SPC) 계열 에스피엘(SPL) 제빵공장에서 일어난 20대 근로자 사망사고 때문이다. 앞치마가 기계에 빨려 들어가며 그 자리에서 사망했고 현장에 있던 동료들이 주검을 직접 수습한 것으로 알려졌다. 사고가 난 기계에는 안전장치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사고 현장을 지켜본 노동자들은 다음날 출근해서 다른 기계에서 작업을 진행했다고 한다.

에스피씨의 잘못된 대응은 이뿐만이 아니다. 사망사고 다음날, 사과 한마디 없이 파리파게뜨의 런던 진출 소식을 담은 보도자료를 배포해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사망한 노동자 장례식엔 조문객 답례품이라며 빵을 놓고 가서 더 큰 공분을 샀다.

에스피씨에서 일어난 사건과 그 대응을 지켜보던 이들이 에스피씨 상품 불매운동에 나섰다. 에스피씨 많은 계열사의 목록과 함께 대체상품 목록도 확산하고 있다. 우리는 소비자 정체성이 압도적인 ‘소비사회’를 살고 있다. 이런 사회에서 불매운동은 매우 큰 의미가 있다. 의미로만 본다면 산업사회에서 노동자들이 최후의 수단으로 쓰는 파업과 맞먹는 행동이다.

1990년대 말 세계무역기구에서 터져 나온 동종상품 논란이 제기한 윤리적 생산의 문제는, 최근에는 20~30대를 중심으로 ‘미닝 아웃’(meaning out)이란 윤리적 소비운동으로 발전해 있다. 이제 우리는 자신의 가치관과 신념에 부합하는 방식으로 상품과 서비스를 소비한다. 이런 올바른 소비는 근본적으로 올바른 생산의 문제와 분리될 수 없다. 에스피씨 불매운동에서 나온, ‘피 묻은 빵을 사 먹지 말자’는 구호에서 양자 간 관계를 분명히 볼 수 있다.

빵은 우리 생명을 잇는 수단이다. 그 빵을 생명을 앗아가는 방식으로 만든다면, 그런 빵을 우리가 일반적으로 여기는 빵과 동종상품으로 여길 수 있을까? 만약 그렇게 여길 수 없다면 그런 빵은 우리가 거래하는 상품의 목록에서 당연히 제외해야만 하지 않을까? 물론 그 선택은 우리 각자의 의사에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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