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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시간의 가격

등록 2022-10-20 18:03수정 2022-10-21 02:35

서울 여의도의 대표적 노후 단지인 시범아파트와 한양아파트를 각각 최고 60층, 50층 높이의 초고층 단지로 재건축하는 방안이 추진된다. 사진은 지난 5월8일 서울 여의도 시범아파트 모습. 연합뉴스
서울 여의도의 대표적 노후 단지인 시범아파트와 한양아파트를 각각 최고 60층, 50층 높이의 초고층 단지로 재건축하는 방안이 추진된다. 사진은 지난 5월8일 서울 여의도 시범아파트 모습. 연합뉴스

[크리틱] 임우진 | 프랑스 국립 건축가·<보이지 않는 도시> 저자

미식가들이 자주 벌이는 설전이 있다. 옛날 맛을 묵묵히 지키는 원조집이 맛있는지, 아니면 원조집의 맛을 계승하면서도 요즘 입맛에 맞도록 개량한 아들딸 집이 더 나은지. 서울이라면 냉면집을 둘러싼 논란이 대표적이겠다. 음식의 역사부터 주인장의 가족관계 등 많은 근거 자료를 동원해 우열을 다투지만, 사실 정답은 단순한 데 있다. 대부분 각자 먼저 접한 집이 자기에게는 더 맛있다. 물론 전문가들은 대부분 원조집 손을 들어준다. 무에서 유를 창조한 업적과 견뎌낸 시간의 가치를 인정해주는 셈이다. 차범근과 손흥민 중 누가 최고냐는 축구 팬들 사이의 논쟁도 비슷한 틀에서 벌어진다.

오래된 것을 찾는 사람들이 있다. 올드 카 마니아, 올드 팝 마니아는 우리 곁에서 흔히 볼 수 있다. 굳이 오래된 자동차와 음반을 힘들게 찾아다니고 비싼 값에 사들인 그들은 이런 말로 자신의 선택을 정당화한다. 요즘 나오는 것은 이런 열정과 감성이 없어. 예전이 물건은 더 잘 만들었어…. 진실은 어디 있을까. 아무리 잘 만든 50년대 슈퍼카도 지금 나오는 가장 싼 자동차보다 빨리 달리지 못한다. 당시 잘 나갔다는 기록과 기억이 현재 관점으로는 부족한 성능을 가려주는 셈이다. 그래도 그들은 오래된 것이 버텨낸 시간에 가치를 두고, 헌것이라 더 행복해한다.

기존 건물이 있는 땅에 건물을 설계해달라는 의뢰를 받은 건축가들이 흔히 겪는 갈등이 있다. 건축주가 요구하는 내용을 충족시키려면 대부분 기존 건물을 철거하고 새로 짓는 게 정답이다. 백지에서 시작하니 설계도 편하고, 시공 기간이 줄어드니 공사비도 줄어든다. 그런데 수십년 그곳을 지킨 건물을 지우고 새 건물을 그릴 때마다 드는 죄책감은 설명하기 힘들다. 긴 시간 무게를 견뎌온 어떤 묵직한 생명을 내 손으로 거두는 것 같은 오묘한 느낌이다. 하지만 대부분, 결국 새로 짓는 쪽으로 가는 게 현실이다. 공사비, 공기, 하자에 대한 압박이 그 죄책감을 상쇄시켜주기 때문이다.

지은 지 20년이 넘으면 우리의 아파트는 ‘노후’ 건축물로 분류된다. 30년이 가까워 오면 당연한 듯 재건축을 위한 절차에 돌입한다. 그즈음 아파트 입구에는 ‘경축. 안전진단 통과’라는 펼침막이 걸린다. 그곳에 계속 살아도 될 정도로 안전하다는 진단을 받은 게 아니라, 노후화돼 이제 철거해야 한다고(할 수 있다고) 진단받은 사실을 그렇게 축하로 표현한다. 그 문장에 생략된 것은 드디어 헌 건물을 부수고 새 건물을 지을 권리를 얻었다는 말이다. 사람들이 새 건물에 집착하는 이유는, 그걸 통해서 더 새롭고, 더 크고, 더 비싼 집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새로 지은 아파트는 값도 잘 쳐주고 환금성도 뛰어나다. 사람들이 그리 생각해주니 한국의 건축가들도 별 고민 할 필요가 없다.

20여년 전 파리에서 갓 건축 실무를 시작했을 때, 오래된 공장 건물 자리에 사옥을 짓고자 했던 프랑스인 건축주가 있었다. 전쟁 전에 지은 낡은 벽돌 외관에, 내부 구조도 노후화돼 기존 건물을 해체하고 새로 건물을 짓는 방안이 합리적이었다. 그렇게 설계도를 그려 건축주에게 보여주며 나는 확신에 차서 말했다. 이 안이 가장 경제적입니다. 도면을 본 그는 나를 멀뚱히 바라보면서 물었다. 건축가님, 80년 된 벽돌벽을 다시 만들 수 있나요? 나는 무슨 질문이 그러냐는 식으로 실룩거리며 답했다. 그렇게 노후화된 벽을 왜 인위적으로 다시 만들어야 하는지 모르겠지만 만들려고 해도 불가능하지요. 제아무리 최고의 장인이라 해도요. 건축주는 옅은 미소를 띠며 다시 물었다. 그럼 당신처럼 뛰어난 건축가도 다시 못 만드는, 80년 시간이 만든 그 벽의 가격은 얼마나 할까요? 미소로 가려진 그의 말속에 분노가 서려 있음은 둔감한 외국인 건축가도 느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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