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의 삶에도 코페르니쿠스적 사건이 있다. 내가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 가치관을 크게 바꿔버리는 혁명적 순간이 때때로 찾아온다. 나의 경우는 집에서 멀리 떨어진 중학교에 배정된 일이었다. 내 삶은 인생을 나보다 앞서 사는 누구와도 다를 것이라는, 더는 당연하고 뻔한 방향으로 흘러가지 않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심채경 | 한국천문연구원 선임연구원
고대 사람들은 인류가 발 딛고 서 있는 이 땅이 세상의 중심이라고 여겼다. 하늘에 떠 있는 모든 천체는 밤과 낮을 지키며 질서 정연하게 우리 주위로 움직여 다닌다고 생각했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는 것 말고는, 아직 지구 밖 우주를 직접 살펴볼 수 없었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골칫거리가 몇 있었다. 밤하늘을 수놓은 빛나는 천체 모두가 같은 방식의 질서를 따르는 것은 아니었다. 순행하는 듯하다 거꾸로 돌아오고, 한동안 홀로 역행하는가 싶더니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한번 더 방향을 바꿔 본래 가던 길을 다시 따라가는 제멋대로의 천체들이 몇 있었다. 태양계의 행성들이다.
오늘날 우리는 태양계 중심에 태양이 있고, 행성을 포함해 태양계의 크고 작은 행성들이 그 주위를 돈다는 것을 안다. 실제로 그렇지 않기에, 중심에 태양이 아닌 지구를 놓고 다른 행성들의 움직임을 설명하려면 여간 곤란한 게 아니다.
그 어려운 것을 해낸 사람이 있었으니 알렉산드리아의 천문학자 클라우디오스 프톨레마이오스다. 그는 행성의 역행을 설명하기 위해 주전원이라는 개념을 도입했다. 지구 주위를 돌 때 단순히 원형으로 도는 것이 아니라, 공전하는 동안 작은 원 궤도를 돈다는 것이다. 다 쓴 연습장에서 종이만 분리배출하기 위해 스프링을 빼낸 적이 있다. 그렇게 빼낸 스프링의 양 끝을 맞닿게 해 동그라미를 만들면서 나는 프톨레마이오스의 주전원을 생각했다. 정확히 같은 모양은 아니지만 떠올려볼 만은 하다.
프톨레마이오스의 주전원은 더 간단한 설명을 선택해야 한다는 ‘오컴의 면도날’ 개념과 대척점에 있다. 중심에 태양을 두었다면 더 간단히 설명할 수 있었을 텐데, 천동설 안에서는 그렇게 복잡할 수밖에 없었다.
주전원과 함께 천동설 자체의 막을 내린 것은 폴란드의 천문학자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다. 그는 행성의 움직임을 성실하게 관측하고, 꼼꼼하게 기록하고, 정밀하게 계산했다. 그의 태양계 모델 중심에는 지구가 아닌 태양이 놓였다. 발표 당시에는 큰 주목을 받지 못했지만, 곧 많은 사람이 그가 제시한 지동설의 진정한 가치를 알게 됐다. 인류의 세계관, 우주관을 바꿔놓은 사건이었다.
누구나의 삶에도 그런 코페르니쿠스적 사건이 있다. 내가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 가치관을 크게 바꿔버리는 혁명적 순간이 때때로 찾아온다. 나의 경우는 집에서 멀리 떨어진 중학교에 배정된 일이었다. 한번도 가본 적 없지만 4지망까지 쓰라고 하기에 별생각 없이 네번째로 적어 넣은 학교였다. 초등학교 친구들은 대부분 가까운 중학교에 배정됐고, 지독하게 운 없는 몇몇 동창들만 너무도 낯선 곳에서 청소년기의 시작을 맞이해야 했다.
그전까지 나의 학교생활이란 꽤 예측가능했다. 손위 형제가 있어 그저 앞서간 인생의 발자국을 따라 밟으면 됐다. 아람단이나 걸스카우트, 수학여행 같은 고학년들의 생활을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에 삶은 항상 당연하고 뻔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중학교 배정통지서를 받은 일이 내 인생의 코페르니쿠스적 순간이었다. 내 삶은 인생을 나보다 앞서 사는 누구와도 다를 것이라는, 더는 당연하고 뻔한 방향으로 흘러가지 않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가족, 친척, 친구들의 삶과 나의 삶을 분리해 보게 되고, 누구도 미리 손봐놓지 않은 나만의 삶에 뿌리내리기 위해, 내가 어떤 존재인지 탐색하기 시작했다. 주변의 호오와 나의 취향을 구분하기 시작했다. 타인의 사소한 여러가지 기대에 자주 부응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것을 발견했고, 전혀 예측하지 못했던 새로운 길이 내게 문을 열어 보일 때, 성큼 발을 내디뎠다. 망원경 한번 만져본 적 없으면서 대학에서 천문학을 배우겠다고 결심할 때, 대학원에서 기껏 행성의 대기를 공부해 놓고 졸업하자마자 대기라고는 하나도 없는 달을 연구하는 분야로 뛰어들 때, 어느 날 갑자기 책을 써보라는 제안을 받고 덥석 수락할 때, 나는 코페르니쿠스를 떠올렸다.
물론 모든 선택이 항상 성공을 보장해 주지는 않았다. 그러나 여기저기 실패로 얼룩진 흔적들을 자꾸만 바라보고 쓰다듬다 보면, 그것도 나의 일부임을 받아들일 수 있는 때가 온다. 혹 누군가 코웃음 칠지라도, 내게는 소중한 나만의 고난과 도전을 향해 오늘도 한발 내디뎌 보자. 주전원의 세계를 떠나 지동설의 세계로, 두렵지만 용기를 내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