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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한 일본 소년과 선감도

등록 2022-10-20 18:00수정 2022-10-21 02:35

지난달 26일 오전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 선감동 선감학원 관련 유해 매장 추정지에서 처음으로 유해발굴 소식을 접한 피해자 이주성(62)씨가 눈물을 훔치며 “강제 감금 당시 어린 동생뻘과 동료들이 생각나서 한걸음에 달려왔다”며 가지고 온 꽃바구니에 ‘미안해’, ‘미안합니다’라는 리본을 달아 매장지에 놓아두었다. 김봉규 기자 bong9@hani.co.kr
지난달 26일 오전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 선감동 선감학원 관련 유해 매장 추정지에서 처음으로 유해발굴 소식을 접한 피해자 이주성(62)씨가 눈물을 훔치며 “강제 감금 당시 어린 동생뻘과 동료들이 생각나서 한걸음에 달려왔다”며 가지고 온 꽃바구니에 ‘미안해’, ‘미안합니다’라는 리본을 달아 매장지에 놓아두었다. 김봉규 기자 bong9@hani.co.kr

[삶의 창] 김소민 | 자유기고가

8살, 이하라 히로미쓰에게 경기도 안산시 선감도는 참외, 대추, 살구 향기가 나는 섬이었다. 헤엄치며 놀다 홍합을 파냈다. 그 펄에서 다른 소년들은 도망치다 죽었다. 이하라는 선감학원 부원장의 아들로 1942년부터 3년간 선감도에서 살았다. 선감학원 아이들은 번호로 불렸다. 그는 어느 날 번호로 불린 사람의 익사체를 보았다. 멍석을 걷자 자기만큼 앳된 얼굴이 드러났다. 소년은 정신없이 달리며 울었다. 이하라는 굶고 맞고 죽은 아이들을 잊지 못한다.

선감학원은 1942년 조선총독부가 지원하는 경기도 사회사업협회가 ‘부랑아’를 “황국신민”으로 키운다는 명분으로 세웠다. 수용 대상은 “연령 8세 이상 18세 미만, 불량행위를 하거나 불량행동을 할 우려가 있는 자”로 모호했다. 가난한 아이들이 붙들려 왔다. 광복 이후 경기도가 1982년까지 운영하며 가난한 아이들을 가두고 학대했다. 설날 길 잃은 쌍둥이 형제는 선감학원에서 엉뚱한 이름을 받았다. 한일동, 이동현. 형은 이곳에서 암매장당했다. 12살에 이곳에 끌려온 김성환씨는 돼지를 치고 뽕잎을 따고 곡괭이로 맞았다. 아이들은 배가 고파 산에서 뱀, 쥐를 잡아먹었다. 성환씨도 탈출을 시도했다 잡혔다. 때리다 지친 교관은 아이들끼리 서로 뺨을 치게 했다. 얼마나 많은 아이가 죽었는지 아무도 모른다.

지난달 26일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는 유해 발굴을 시작했다. 국가기관으로는 처음이었다. 5일 만에 유해 5구, 치아 68개, 단추 6개가 나왔다. 여기까지 오는 데 선감학원이 폐쇄된 뒤 40년이 걸렸다. 그 시작은 이하라 히로미쓰가 경험과 취재를 바탕으로 54살이던 1989년 내놓은 소설 <아! 선감도>였다. 그는 서문에 “일본이 범한 전쟁의 죄를 당시 경험한 일본인으로서 고발해 속죄한다”고 썼다. 이하라가 17살 때 아버지가 숨졌다. 그는 30여년 넘게 트럭을 몰아 생활비를 벌었다. 선감학원의 기억은 이하라를 따라다녔다. 30살, 기록을 남기기로 결심한 그는 거의 매년 한국을 방문해 홀로 취재를 이어간다.

1996년 경기도 도사편찬위원회에서 일하던 역사학자 정진각(안산지역사연구소 대표)씨는 안산시청으로 불려간다. ‘일본인이 찾아와 선감학원인지 뭔지 위령비를 세워야 한다는데, 무슨 소린지 모르겠다’며 한 공무원이 그를 불렀다. 이하라를 만난 뒤 정진각씨는 선감학원을 파헤친다. “어디에도 자료가 없었어요. 도사편찬위원회 일을 하며 틈틈이 선감학원 정보를 찾았어요. 신경 못 쓰고 있다가도 이하라가 국제전화 걸고 일년에 두번씩 찾아오니, 그분 온다 하면 그때부터 다시 뒤졌어요.” 정씨는 선감학원 관련 자료를 블로그에 올리고 여기저기 알렸다. 2010년께 피해자들이 한두명씩 연락해 왔다. 피해자들이 나서니 경기도는 뒤늦게 선감학원 원아대장을 찾았다. 그 자료에 따르면, 피해자는 4691명이지만 정확하지 않다. 초등학교도 다니지 못한 아이들은 선감학원이 폐쇄된 뒤 거리로 내몰렸다.

정씨에게 20여년간 선감학원을 놓지 못하는 까닭을 물었다. “이하라 집에 간 적이 있어요. 선감도 어르신들과 주고받은 편지들을 보여줘요. 그렇게 자료들을 모은 거예요. 선감학원은 어린아이들의 싹을 잘라버린 국가폭력이에요. 일본 사람이 이렇게 하는데 한국 사람이 가만히 있다는 건 죄 아닌가요.” 69살 정씨의 바람은 숨진 아이들의 이름이라도 밝혀내는 것이다. “그 아이들은 이제 노인이지만 그들의 부모가 아직 찾고 있을지 몰라요.”

‘내게 천국이 네게 지옥’이라는 죄책감을 쉽게 푸는 방법이 있다. 혐오다. ‘너는 당할 만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마음 편하다. 이하라는 그럴 수 없었다. 같은 인간이라서. 87살이 된 소년은, 소년들을 여전히 떠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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