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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백일홍 다이너마이트’ 곁을 지키며 아이랑 성장하기

등록 2022-10-19 18:54수정 2022-10-20 02:38

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세상읽기] 이병곤 | 제천간디학교 교장

어떤 사람이 되길 바라는 마음이 없어요. 푸른이는 게임 말고는 특별한 관심 분야를 아직 못 찾았어요. 다른 사람에 관해 이야기할 때 정중합니다. 공격하는 말을 듣지 못했죠. 아이 마음에 화가 없으니 예의를 잘 지켜요.

2학년 때 한 학기 휴학했어요. 누구에게든 가장 예민한 시기라고 하겠죠. 그 당시 아이 마음속에 깃들어 있던 휴학 사유는 ‘민감 정보’라서 자세히 말씀 못 드려요. 휴학한 다음 아이는 덕산면에서 충주시까지 권투를 배우러 다녔어요. 우리 식구들은 귀촌해 학교 맞은편 마을에 살거든요. 집 나서는 길에 버스를 타면 같은 학교 재학생들을 자주 봅니다. 아이는 그 어색할 수 있는 마주침을 꺼리지 않았어요. 권투 도장을 한달쯤 다니다가 어느 날 자기 짐을 챙겨 오더니만 “학교로 돌아가겠다”고 말하더군요.

푸른이는 자기 마음을 정리하기 전까지 말을 아끼는 편이에요. 저는 왜 복학하려는 결정을 했느냐 물었어요. 권투 연습 하러 버스 타고 나갈 때 재학생 선후배들을 바라보면서 “이들과의 관계를 이렇게 끝내서는 안 되겠다는 느낌이 들었다”고 하더군요. 성장하는 아이 곁을 지켜보니 끝났다고 느끼는 그 순간이 사실 끝나는 게 아니더라고요. 흙탕물이 가라앉기를 기다려야 합니다.

한때 푸른이는 방, 거실, 화장실, 그리고 게임세계 사이를 무한 반복했어요. 계절이 한번 바뀔 때라야 집 밖으로 빠끔히 나오는 것 같았어요. 진정으로 본능에 충실한, 행복한 아이였죠. 저는 이상한 엄마인가 봐요. 그 상황이 아무렇지 않았어요. 제 삶을 돌아보니 사람 일생에서 푸른이처럼 살 수 있는 기간이 그리 길지 않더라고요.

‘백일홍 다이너마이트’라는 식물 이름을 들어보셨는지요. 화원 아저씨 권유로 막대처럼 생긴 것 한주를 사왔죠. 화단에 꽂아놓고 아무리 기다려도 꽃이 안 피어났어요. 마당에 박혀 있는 미운털 같았죠. 마을사업과 덕산면 지역아동센터 누리꿈터 일에 바빠 정원 돌보기를 잊고 지내던 어느 날, 문득 마당을 내다봤어요. 초록빛 잎과 새빨간 꽃이 일시에 화사하게 피어나 있는 거예요. 초라했던 나무 작대기가 그토록 기막힌 반전 매력을 품고 있을 줄은 전혀 몰랐죠.

아이들은 ‘학교에서 배우는 거 별로 없다’는 말을 달고 살죠. 하지만 지금 푸른이를 포함한 우리 4학년 아이들이 꽃망울 터뜨리는 모습을 보세요. 백일홍 다이너마이트처럼 그냥 잠시 놔두고 부모는 자기 일에 집중하면 됩니다. 딱 부러지게 가르기 어렵지만 저는 푸른이의 성정이 이 학교에서 빚어졌다고 봅니다. 배움공동체에 배어 있는 독특한 공기가 아이 성장에 필수 자양분이 된 것이죠.

같은 학년 친구들이 올해 들어 5월 대동제, 10월 축제, 개교 25주년 행사를 근사하게 치러내는 모습을 보면서 푸른이는 가슴이 벅찼대요. 지난 세월 동기들이 내성적인데다 마냥 순진하기만 하다고 생각했는데, 자신들이 특정한 역할을 맡으니까 척척 잘해내는 것을 보고 감탄하더군요.

청소년기 6년은 길어요. 그렇다 보니 학교생활에는 생체리듬 같은 것이 있어요. 1~2학년 때는 놀기와 친구 사귀기에 집중하고, 3학년부터는 논문을 쓰기 시작합니다. 4학년에 오르면 학생회를 맡아 학교의 일상을 운영하고, 자치 조직을 이끌어가죠. 이런 역할과 과제가 아이들 마음속에 어떤 흐름을 만들어내요. 아이들은 그 파도를 타면서 오르락내리락합니다. 어른들은 파도와 정면으로 맞부딪치라고만 말해요. 안 될 일이죠. 그러면 아이들은 쓰러집니다.

제 아들 푸른이는 누군가에게 자랑할 만한 요소가 많지 않습니다. 하지만 저에게는 재미있고 따뜻한 친구입니다. 며칠 전 개교 25주년 기념 뮤지컬에 제가 잠시 출연하기 직전이었어요. 무대 근처로 다가와서 “엄마, 파이팅이에요!” 하고 속삭여줬습니다. 제가 자는 사이 김장 때 필요한 김치통 여러개를 모두 차에 실어놓기도 했어요. 아침 출근길에 하려면 시간이 없을 거라면서요. 삶이 먼저라는 생각이 듭니다. 내신성적과 수행평가, 수능시험 준비에 치이면 아이들이 어떻게 자신의 주변을 챙기겠어요.

부모가 중심을 잡고, 시간을 견디면서 자녀 성장에 대한 불안감을 헤쳐가야 합니다. 곤샘이 늘 말씀하시는 ‘애정 어린 무관심’이 아이들 대할 때 가장 좋은 마음가짐이라 생각해요.

※우리 학교 4학년 백늘푸른의 어머니 김미애씨와 나눈 대화를 재구성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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