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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정진석이 되살린…1949년 강대국의 ‘독립운동 폄훼’ [박찬수 칼럼]

등록 2022-10-19 15:26수정 2022-10-20 02:38

정진석 위원장은 사과는커녕 “친일로 호도하지 말라”고 성을 냈다. 역사적 사실을 외면하거나 미화하자는 건 아니다. 그러나 1937년 <동아일보>가 호외를 낼 정도로 반향을 일으킨 보천보 전투는 ‘좌파 독립운동’이니까 역사에서 배제하고, 해방 직전 연합국의 일원으로 인정받고자 애썼던 임시정부의 시도는 현실성 없다고 눈을 감아버리면, ‘1945년 해방은 미군이 준 선물’이라는 발상 외엔 남는 건 아무것도 없다.
1949년 미 국무부 극동국이 작성한 ’대일 평화회담에 한국이 참여하는 문제’라는 제목의 문건. 미 국무부는 “한국이 (항일) 무력투쟁을 했다는 주장을 뒷받침할 근거가 없는 건 아니나 그에 반하는 증거들이 더 강력하다”며 한국의 회담 참여가 적절치 않다고 밝혔다. ※ 이미지를 누르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박찬수 | 대기자

2004년 워싱턴 특파원 시절, 메릴랜드주 칼리지파크에 있는 미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에 1주일 정도 출근하다시피 하며 국무부 비밀해제 문건들을 들여다본 적이 있다. 한국 관련 문건을 뒤지다 보면 특종 하나쯤 건질 수 있지 않을까 기대했는데, 뚜렷한 성과는 없었다. 이미 한국의 현대사 연구자들이 비밀해제 문건을 샅샅이 살펴보고 있었다. 또 다수 문건의 중요 대목은 아직도 검은색으로 가려져 있었다.

그래도 개인적으로 재밌게 읽은 문건이 여럿 있다. 그중 하나는 1973년 1월 김종필 국무총리가 필립 하비브 주한 미국대사를 만나 나눈 대화를 기록한 전문이다. 전문을 보면, 김 총리는 박정희 정권의 내부 기류를 하비브 대사에게 고스란히 얘기한다. 가령 “나는 반대하지만, 박 대통령은 언론 활동과 정치적 자유를 더 옥좨야 한다는 몇몇 참모들의 의견에 기울어 있다”고 말하는 식이다. 이런 기류는 1년 뒤 1974년 1월의 긴급조치 선포로 현실화했다. 그 무렵 한국에서 미국의 영향력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수 있는 대화록이다.

또 하나는, 1949년 12월 미 국무부 극동국이 작성한 ‘대일 평화회담에 한국이 참여하는 문제’란 제목의 문서였다. 패전국 일본의 영토와 배상 등을 규정하는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 한국 정부가 참여하는 게 타당한지 검토한 이 문서는 의미가 있었다. 샌프란시스코 조약 최종안에 ‘일본은 제주도·거문도·울릉도를 비롯한 한국에 대한 모든 권리를 포기하고…’라고만 명시한 게 이후 한-일 독도 영유권 분쟁의 불씨를 남겼다. 그때 한국 정부가 회담 당사자로 참여했다면 독도 문제는 깨끗하게 매듭지어졌을 것이다.

미 국무부 극동국은 한국의 강화조약 참여가 적절치 않다고 결론 내렸다. 그 이유로 “한국이 (항일) 무력투쟁을 했다는 주장을 뒷받침할 만한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에 반하는 증거들이 더 강력한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국무부는 “1차 세계대전 이후에 조직된 한반도 밖의 민족주의 단체 대부분은 공식적인 국제사회 승인을 받지 못했을 뿐 아니라, 국내에 거의 군사력을 보유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2차 세계대전 기간에만 중국의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중국 내 한국 군사력에 한해 통일된 영도력을 가졌을 뿐이다”라고 평가했다. 한국 본토를 겨냥해 일제와 무력투쟁을 전개하지 못했기에 연합국의 일원으로 볼 수 없다는 뜻이다. 김구 선생이 1945년 해방 직전에 광복군을 재정비해 서울 진공작전을 구상했던 것도 국제사회의 이런 평가를 염두에 둔 것이 아닐까 싶다. 한국 독립운동에 대한 낮은 평가가 일본 패망 이후에도 우리 주권을 제약한 셈이다.

오래전 미 국무부 문서의 기억이 떠오른 건, 정진석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 발언 때문이다. 정 위원장은 “조선은 왜 망했을까. 일본군의 침략으로 망한 걸까. 조선은 안에서 썩어 문드러졌고 그래서 망했다. 일본은 조선왕조와 전쟁을 한 적이 없다”고 밝혔다. 구한말 의병들의 투쟁에 눈감은 이런 평가는, 일제강점기 무장투쟁, 의열투쟁, 소작쟁의 등 다양하고 끈질긴 저항운동을 ‘전면적’이 아니라는 이유로 평가절하한 해방 직후 강대국의 인식보다도 오히려 못하다. 약소국 해방운동을 폄훼하는 논리를 20세기 강대국들의 국제정치의 장이 아니라, 21세기 한국의 집권 정당에서 마주하는 건 안타까운 일이다.

정진석 위원장은 사과는커녕 “친일로 호도하지 말라”고 성을 냈다. 팩트를 말한 건데 왜 ‘친일 프레임’을 씌우냐는 반격이다. 역사적 사실을 외면하거나 미화하자는 건 아니다. 그러나 1937년 보천보 전투 같은, 비록 규모는 작지만 <동아일보>가 호외를 낼 정도로 반향을 일으킨 동북항일연군과 조선광복회원들의 함경도 일본경찰 주재소 타격은 ‘좌파 독립운동’이니까 역사에서 배제하고, 해방 직전 연합국의 일원으로 인정받고자 애썼던 임시정부의 시도는 현실성이 없다고 눈을 감아버리면, ‘1945년 해방은 미군이 준 선물’이라는 발상 외엔 남는 건 아무것도 없다.

세계 어느 나라도 스스로를 낮추는 자학사관으로 위기를 넘어서는 걸 보지 못했다. 사실 이런 식의 ‘민족적 자부심’은 원래 보수 세력의 자랑거리 아닌가. “오늘 우리 세대가 땀 흘려 이룩하는 모든 것이 결코 오늘을 잘 살고자 함이 아니다. 한 세대의 생존은 유한하나 조국과 민족의 생명은 영원하다”며 새마을 운동을 시작한 건 박정희 대통령이었다. 현 집권세력은 그런 자부심마저도 제대로 일으키질 못하니, 구한말에 비견되기까지 하는 안팎의 위기 상황을 어떻게 헤쳐나갈지 걱정스럽다.

pc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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