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오피니언 칼럼

알키비아데스를 감전시키는 소크라테스의 권위

등록 2022-10-18 18:19수정 2022-10-19 02:34

[고명섭의 카이로스]
아렌트는 말한다. “권위에 대한 최대의 적은 경멸이며, 권위를 훼손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비웃음이다.” 국제정치의 무대는 날것의 이해관계가 지배하는 곳이지만, 이 비정한 무대에서도 지도자의 도덕적 권위는 무시할 수 없는 힘을 발휘한다.

프랑수아앙드레 뱅상이 그린 <소크라테스의 가르침을 받는 알키비아데스>(1776). 알키비아데스는 고대 그리스 세계에서 가장 많은 논란을 일으킨 ‘문제적 인간’이다. 위키미디어 코먼스
프랑수아앙드레 뱅상이 그린 <소크라테스의 가르침을 받는 알키비아데스>(1776). 알키비아데스는 고대 그리스 세계에서 가장 많은 논란을 일으킨 ‘문제적 인간’이다. 위키미디어 코먼스

알키비아데스(기원전 450~404)는 투키디데스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의 주인공 가운데 한 사람이자 고대 그리스 세계에서 가장 많은 논란을 일으킨 인물이다. 아테네 전성기를 이끈 정치지도자 페리클레스를 외삼촌으로 둔 명문가 출신이었고 외모가 빼어나고 언변이 출중한데다 지략이 뛰어나고 배짱까지 두둑해 전략가이자 정치가로서 아테네 민중 사이에서 대단한 인기를 누렸다. 하지만 빛이 밝은 만큼이나 그림자도 짙었는데, 지나치게 야심이 큰데다 오만이 하늘을 찔러 정적을 무수히 만들어냈다.

알키비아데스의 야심과 오만이 부른 사건 가운데 하나가 기원전 415년 시칠리아 원정을 앞두고 일어난 헤르메스상 훼손 사건이다. 시칠리아 원정은 장군으로 선출된 젊은 알키비아데스가 무공을 노리고 적국 스파르타의 동맹국인 시칠리아의 시라쿠사를 공격하자고 선동해 일으킨 군사적 모험이었다. 그 원정군이 출항하기 전날 아테네 시내의 헤르메스 신 흉상들이 훼손되는 일이 일어났다. 원정이라는 큰일을 앞두고 일어난 불길한 일이었기에 온 아테네가 뒤숭숭해졌다. 기회를 잡았다고 생각한 정적들은 알키비아데스와 친구들이 전에 술에 취해 다른 석상을 훼손한 적이 있었다는 사실을 빌미로 삼아 알키비아데스를 사건의 주모자로 몰았다.

알키비아데스는 예정대로 원정군 사령관으로 시칠리아를 향해 떠났으나 결석재판에서 신성모독죄로 사형을 당할 위기에 빠지고 말았다. 목숨이 위태로워진 알키비아데스는 적국 스파르타로 망명해 아테네 군대에 궤멸에 가까운 타격을 안겼고, 머잖아 스파르타에서도 추문을 일으켜 페르시아로 도망갔다. 조국으로 돌아갈 기회만 찾던 알키비아데스는 아테네와 스파르타 사이에 다시 전투가 벌어지자 자신의 전함을 동원해 스파르타 쪽 함대를 격파하는 데 결정적 기여를 했다. 아테네는 알키비아데스의 귀환을 허락했다. 하지만 몇년 뒤 정적들의 공격을 받아 또다시 아테네에서 추방당했고, 마지막엔 스파르타의 사주를 받은 자객에게 암살당했다. 재능으로 명성을 얻고 오만으로 악명을 떨친 ‘문제적 인간’의 전형이 알키비아데스다.

이 인물은 젊은 시절 소크라테스가 아끼고 사랑한 제자였던 덕에 플라톤의 대화편에도 여러차례 등장한다. 그중에서도 <향연>에서 알키비아데스의 인품이 사실에 가깝게 묘사됐다. <향연>은 아가톤이라는 젊은 극작가가 비극 경연에서 우승한 직후 자기 집에서 베푼 잔치를 배경으로 한다. 시기는 기원전 416년, 그러니까 알키비아데스가 시칠리아 원정군 사령관으로 출전하기 1년 전쯤이다. 알키비아데스는 이야기 후반부에 출현한다. 잔치 참석자들이 돌아가면서 사랑의 신 에로스를 찬미하고 난 뒤 잔치가 파할 무렵, 술 취한 젊은이들이 우당탕탕 소리를 내며 아가톤 집으로 들어선다. 알키비아데스와 추종자들이었다.

알키비아데스가 아가톤과 소크라테스 사이에 끼어 앉아 옛 스승을 놀리기 시작한다. 잘생긴 남자만 좋아해서 항상 옆에 끼고 있으려 한다느니, 소크라테스 앞에서 다른 사람을 칭찬이라도 하려고 하면 손찌검부터 하려고 달려든다느니, 하는 말이 스승에게 할 법한 얘기가 아니다. 포도주를 2리터들이 동이에 따라 단숨에 들이켜고는 스승에게도 마시라고 강권하기까지 한다. 이렇게 방자하던 알키비아데스의 태도가 어느 순간 바뀌기 시작한다. 스승과 피리 부는 못생긴 사티로스 ‘마르시아스’가 닮았다고 놀려대더니 이윽고 진심을 털어놓는다.

“소크라테스 선생님과 마르시아스의 유일한 차이점은 선생님은 악기를 사용하지 않고 순전히 말씀만으로 같은 효과를 거둔다는 겁니다.” 알키비아데스는 소크라테스 말의 힘을 이렇게도 묘사한다. “선생님이 말씀하시는 것을 우리가 직접 듣거나 남이 전하는 것을 듣게 되면 전달자가 아주 보잘것없다 해도 듣는 사람이 여자든 어린아이든 모두 압도되고 매혹됩니다.” 강력한 전류가 전도체의 부실함을 뚫고 세차게 흐르듯, 전달자가 설령 말주변이 없는 사람이더라도 듣는 사람들을 감전시킨다는 얘기다.

알키비아데스의 말은 이어진다. “소크라테스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있노라면 나는 심장이 뛰고 눈물을 흘린다네. 지금도 이분 말씀에 귀를 기울이면 어쩔 수 없이 똑같은 경험을 하게 되리라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네. 이분은 내가 부족한 것이 많은데도 나 자신을 돌보지 않고 아테네 정치에 골몰한다는 것을 시인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 테니까. 그래서 나는 세이렌의 노래를 듣지 않으려고 귀를 막듯이 귀를 막고 도망치는 것이네.” 알키비아데스는 자신이 소크라테스 앞에서 느끼는 부끄러움도 고백한다. “이분 말씀대로 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이분 곁을 떠나기만 하면 나는 대중의 인기에 연연하게 되네. 그래서 나는 도망치는 노예처럼 달아나다가도 이분을 만나게 되면 부끄러움을 느낀다네.”

술에 취해 털어놓은 고백조의 이야기는 어느덧 절정에 이른다. “이분은 무식한 척 사람들을 놀려대며 평생을 보내시지만, 이분이 진심으로 돌아가 자신의 속내를 내보였을 때 나는 이분 안에 들어 있는 상들을 본 적이 있네. 그 상들은 신적이고 황금 같고 더없이 아름다워서, 나는 소크라테스가 시키는 일이면 무엇이든 해야 한다는 느낌이 들었네.” 소크라테스는 권위 같은 것을 찾아볼 수 없는 사람이지만, 알키비아데스는 옛 스승에게서 흘러나오는 무형의 힘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소크라테스 전류는 오만의 겉옷을 뚫고 들어가 사람을 감전시킨다. <향연>의 소크라테스는 권위를 내세우지 않는 권위의 표본이다.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폭력론>(1969)이라는 글에서 권력과 폭력의 관계를 찬찬히 살핀 바 있다. 아렌트가 보기에, 좌파와 우파를 막론하고 정치학자들은 마치 합의된 견해인 양 권력과 폭력을 구분하지 않는다. 폭력은 권력의 거친 발현일 뿐이지 둘 사이에 근본적인 차이가 없다고 보는 것이다. 막스 베버가 <직업으로서의 정치> 서두에서 ‘모든 국가는 폭력에 기초를 두고 있다’는 트로츠키의 말을 인용하고는 “정말 옳은 말”이라고 한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아렌트는 이런 견해에 단호하게 반대한다. “권력과 폭력은 대립한다. 하나가 절대적으로 지배하는 곳에 다른 하나는 존재하지 않는다. 폭력은 권력이 위기에 빠질 때 등장하지만, 제멋대로 두면 권력의 소멸로 끝난다.”

폭력과 권력은 서로 반대되는 것이어서 권력이 완전한 형태로 작동하는 곳에서는 어떤 폭력도 필요하지 않다는 것이 아렌트의 견해다. 통치권력을 구성하는 것은 인민의 동의와 지지이기 때문에 완전한 권력은 완전한 동의를 뜻하고, 그러므로 권력이 완전한 곳에는 폭력이 동원될 필요가 없다. 권력이 빠져나가는 곳에서만 그 빈 곳을 메우려 폭력이 사용된다. 같은 글에서 아렌트는 권위와 권력이 어떻게 다른지도 이야기한다. 권력이 집합적 동의 속에 작동하는 것이라면, 권위는 개인의 인격에 귀속된다. 부모와 자식 사이에, 선생과 제자 사이에 성립하는 것이 인격적 권위다. 권위는 직위에도 속할 수 있는데 성직자의 권위가 그런 경우다.

인격적 권위는 국가 지도자에게서도 당연히 발견될 수 있다. 알키비아데스가 소크라테스에게서 본 지고한 도덕적 권위까지는 아닐지 몰라도, 사람들이 국가 지도자를 믿고 따르려면 그 지도자에게서 배어나는 무형의 권위에 대한 최소한의 존경심이 있어야 한다. 아렌트는 말한다. “권위를 유지하는 것은 인격이나 지위에 대한 존경을 요구한다. 따라서 권위에 대한 최대의 적은 경멸이며, 권위를 훼손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비웃음이다.” 권위는 인격에 대한 존경심에서 나오는데, 그 권위를 무너뜨리는 것이 다름 아닌 경멸과 비웃음이다. 같은 이야기를 마키아벨리도 <군주론>에서 한 적이 있다. “군주는 마치 배가 암초를 피하듯 경멸받는 것을 피해야 한다.”

국제정치의 무대는 날것의 이해관계가 지배하는 곳이지만, 이 비정한 무대에서도 지도자의 도덕적 권위는 무시할 수 없는 힘을 발휘한다. 흑인해방운동에 평생을 바친 넬슨 만델라 같은 사람이 나라의 경제력이나 군사력과는 무관하게 국제정치에서 지도력을 발휘했던 것, 반대로 세계 최강국의 대통령이었던 조지 W. 부시나 도널드 트럼프 같은 사람이 국제정치의 웃음거리가 됐던 것을 생각해보라. 국가 지도자가 저급한 언사와 비굴한 처신으로 국제무대에서 비웃음을 사는 것은 그 자신의 불행일 뿐만 아니라 그 지도자가 대표하는 국가의 불행이다. 지도자가 추락할 때 국가도 추락하지 않을 수 없다.

고명섭 | 책지성팀 선임기자
<하이데거 극장-존재의 비밀과 진리의 심연>(1, 2), <니체 극장-영원회귀와 권력의지의 드라마>, <즐거운 지식>, <광기와 천재-루소에서 히틀러까지 문제적 열정의 내면 풍경>, <지식의 발견-한국 지식인들의 문제적 담론 읽기>, <이희호 평전-고난의 길, 신념의 길>을 썼다. 카이로스는 때·시기·기회를 뜻하며 현재를 밝히는 순간의 섬광을 가리킨다. 카이로스의 눈으로 철학·사상·역사를 포함한 인문학을 탐사하며 우리 시대와 대화한다.
michael@hani.co.kr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오피니언 많이 보는 기사

[사설]12·3 내란 수사, 권한시비 끝내고 경찰 중심으로 해야 1.

[사설]12·3 내란 수사, 권한시비 끝내고 경찰 중심으로 해야

명예를 안다면 대통령직 사퇴하라 [성한용 칼럼] 2.

명예를 안다면 대통령직 사퇴하라 [성한용 칼럼]

[사설] 윤 대통령 ‘하야 없다’는데, 국힘 ‘탄핵’ 거부할 이유 있나 3.

[사설] 윤 대통령 ‘하야 없다’는데, 국힘 ‘탄핵’ 거부할 이유 있나

계엄령과 을사오적 [유레카] 4.

계엄령과 을사오적 [유레카]

‘내란 수사’ 두 번 말아먹은 검찰, ‘윤석열 수사’ 자격 없다 5.

‘내란 수사’ 두 번 말아먹은 검찰, ‘윤석열 수사’ 자격 없다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