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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전치형의 과학 언저리] 대통령의 말과 과학자

등록 2022-10-13 18:23수정 2022-10-14 02:38

대통령의 말이 과연 어떻게 들리는지, 전문가들이 등장해 음성인식 기술을 제시하고 주파수를 계산했다. 대통령의 설명을 들을 방법이 없는 정치인과 기자들은 과학자들의 말을 따다가 자기주장의 근거로 삼았다. 과학자가 이렇게 진단했으니 우리도 대통령의 말을 이렇게 이해해야 한다는 식이었다.
지난 4일 국회 외교통일위원회 회의실에서 열린 국정감사에서 무소속 김홍걸 의원이 윤석열 대통령의 비속어 관련 영상을 보여주지 못하자 노트북 음성을 마이크로 틀고 있다. 공동취재사진
지난 4일 국회 외교통일위원회 회의실에서 열린 국정감사에서 무소속 김홍걸 의원이 윤석열 대통령의 비속어 관련 영상을 보여주지 못하자 노트북 음성을 마이크로 틀고 있다. 공동취재사진

전치형 | 카이스트 과학기술정책대학원 교수·과학잡지 <에피> 편집주간

윤석열 대통령이 쓴 비속어는 과연 누구를 향했는가? 그는 정말 미국 대통령과 의회에 모욕적인 말을 했는가? 지난달 미국 방문 중 윤석열 대통령이 회의장에서 나오며 한 말을 두고 온 나라가 한바탕 난리를 겪었다. 대통령실이 내놓은 해석이 더 큰 논란을 낳았고, 정치권은 대통령 발언의 진실을 놓고 전투를 치렀다. 그 말에 대해 가장 잘 알고 있을 대통령 본인이 직접 해명을 내놓지 않았던 탓에 너도나도 영상을 반복 재생하며 귀를 기울여야 했다.

이 사태에서 한가지 주목할 것은 과학 또는 과학자가 정치적 논란 해소를 위해 소환되는 방식이다. 대통령의 말이 과연 어떻게 들리는지 묻는 여론조사까지 실시되는 상황에서, 소리를 과학적으로 연구한다는 전문가들이 등장해 음성인식 기술을 제시하고 주파수를 계산했다. 인간의 해석이 엇갈리는 대통령의 말을 인공지능은 어떻게 인식할지 따져보기도 했다. 대통령의 설명을 들을 방법이 없는 정치인과 기자들은 과학자들의 말을 따다가 자기주장의 근거로 삼았다. 각종 이론과 도구를 써서 소리를 연구하는 과학자가 이렇게 진단했으니 우리도 대통령의 말을 이렇게 이해해야 한다는 식이었다.

아쉽게도 소리의 과학을 연구하는 전문가들은 이번 논란을 해소하는 데 실패했다. 이른바 과학적 분석은 대통령의 말을 상이하게 해석해온 사람들의 합의를 끌어내지 못했다. 정치인과 시민과 언론은 자신의 입장에 부합하는 분석을 내놓은 전문가의 말을 옮기고 증폭할 뿐이었고, 전문가 대다수가 동의하는 설득력 있는 결론이 제시돼 여론에 영향을 미치는 일은 없었다. 과학은 사회적 관심이 집중된 문제에서 왜 권위 있는 심판이 되지 못했는가?

한때는 불편부당한 과학이 불신과 반목이 있는 곳에 신뢰와 합의를 가져다주리라 믿는 사람도 많았다. 하지만 진영을 나눠 싸우는 데 익숙해진 이들은 이제 어떤 사안에 관해서도 자신의 입장을 지지하는 근거를 찾아줄 과학자 한두명쯤 확보하는 일이 어렵지 않음을 알고 있다. 어떻게 해서라도 논쟁에서 이기려는 정치세력들은 각자 듣고 싶어 하는 얘기를 해줄 전문가를 섭외하고 그 말을 인용하는 데 능숙하다. 그러므로 대통령 발언 하나를 놓고 과학자가 동원되거나 뛰어드는 현상은 그저 진실에 대한 한국 사회의 열망을 보여주는 징표로만 볼 수 없다. 이는 결과적으로 이 사회에 가득한 불신의 깊이를 드러냈다.

물론 과학과 과학자가 사회적으로 의미 있는 논쟁에 참여해 과학적 근거와 견해를 제시하는 일은 가능하고 또 필요하다. 그러나 이번처럼 개별 과학자가 정치권이 짜놓은 틀 안에서 발언하고 이를 언론이 소비하는 방식으로는 과학이 공공의 신뢰를 얻으면서 논의에 기여하기 어렵다. 어떤 사회적 문제에 관해 정말로 과학자의 목소리를 들어야 한다고 모두가 동의한다면, 우리는 신뢰할 만한 과학자 공동체가 그 사안을 충분히 검토하고 합의한 결과를 공식적으로 내놓을 수 있는 통로를 마련해야 한다.

대한조선학회가 지난달 해산한 사회적 참사 특별조사위원회에 세월호 침몰원인 조사에 대한 의견서를 제출한 게 그런 사례다. 대한조선학회는 회원 30여명이 참여하는 전문위원회를 꾸려 여러차례 회의를 열고 세월호 침몰원인 조사 결과를 평가한 공식의견서를 학회장 명의로 발송했다. 조선공학 분야 최대 규모 학회의 전문가들이 지성을 모아 공식적이고 집단적으로 견해를 발표한 것이다. 특히 일회성 자문으로 그치지 않고 절차를 밟아 공적 문서를 생산했다는 점이 중요하다.

대통령의 미국 발언이 과학자들의 공식적이고 집단적인 분석을 거쳤어야 했다는 말은 아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번 사태를 사회적 논쟁의 해결을 위해 어떤 방식으로 과학자 공동체의 분석과 해석을 요청해야 하는지 돌아보는 계기로 삼을 수 있다. 대통령의 비속어 발언은 과연 과학자 공동체의 집단지성을 가동해야 할 대상인가? 만약 그렇다면 숙의 과정을 거쳐 사회적 토론에 참여할 자격과 의지가 있는 전문가 집단은 얼마나 있는가? 또 우리는 그러한 전문가 집단의 판단을 존중하고 이를 사회적 논의에 반영할 준비가 돼 있는가? 대통령의 발언이 빚은 황당한 소동을 겪으면서 과학자 개인의 번뜩이는 통찰이나 신념이 아니라 사회적 역할을 부여받은 엄중한 제도로서 작동하는 과학을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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