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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종교상의 이유로 거절합니다

등록 2022-10-13 18:23수정 2022-10-14 02:35

클립아트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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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창] 정대건 | 소설가·영화감독

지금은 술자리를 즐기는 편이지만 20대 내내 술자리 문화가 무척 싫었다. 술이 체질에 맞지 않기도 했고 그때는 술맛을 몰랐다. 어쩔 수 없이 술자리에 참석해야 할 일들이 있었고 그럴 때마다 일찍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 고역이 따로 없었다. 집에 가려는 사람을 왜 그렇게 붙잡아대는지. 가족의 일이 있다고 하면 됐을 일인데 나는 거절도 잘 못했고 정색하지 않으면서 적절한 핑계를 대는 요령도 부족했다. 그렇게 붙잡혀 있는 시간마다 내내 괴로웠다.

어릴 적부터 우리나라의 문화 중에 나와 정말 맞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이 개인보다 관계를 훨씬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문화다. 가령 그런 술자리에서 ‘내가 늘 해야 하는 루틴이 있어서 먼저 가봐야 한다’고 한다면 비난을 받겠지만, ‘여자친구랑 약속이 있어서’라고 한다면 자기들을 두고 어떻게 여자친구에게 갈 수 있느냐는 비난 같은 것은 하지 않는다. 서로를 놀리고 깎아내리는 화법에 익숙한 남자들과 있을 때조차 커플의 일과 가족의 일은 우대하는 문화가 존재한다.

이는 비단 술자리뿐만 아니라 개인보다 집단을 우선시하는 모든 종류의 문화에 대한 이야기이다. 초등학생 때부터 공교육 12년간, 그리고 대학 생활, 군 생활까지 개인주의를 존중하지 않는 이 사회의 분위기에 스트레스를 받았다. 전부를 왕따시키는 식으로 혼자를 자처했지만 나도 사람인지라 스스로를 부적응자라고 생각하거나 이대로는 외톨이로 살게 되리라 하는 생각으로 적잖이 스트레스를 받았다. 무리에서 떨어져 나왔을 때 불이익을 걱정하고 그토록 스트레스를 받았던 것은 사회적 분위기 때문이었다.

조직에 속해 있지 않은 프리랜서로 살아가고 있는 요즘은 그 시기에 비해 자유롭다. 약속을 잡는데도 마감이 중요한 이유가 돼준다. “마감이 있어서”라고 하면 많은 것을 차단할 수 있다. 가령 나는 내가 정한 어느 날까지는 한달 넘게 칩거할 예정이고 아무 약속도 잡지 않을 예정이다. 실제로 시간에 쫓기기도 하고, 타인과의 약속보다 중요한 자신과의 약속이다. 물론 이것을 지키지 않으면 죽도 밥도 되지 않는다는 공포가 자리하고 있다.

일본에서 만들어졌다는 엠톱(MtoP)교단이라는 것을 보고 이거다! 싶었다. 엠톱교단은 일본인 히사노 모토히로라는 사람이 만든 패러디 종교다. “종교상의 이유”는 둘러대기 위한 아주 좋은 핑곗거리가 돼준다. 회식과 야근 등을 피하기 위해 만든 종교로 1만명의 신도를 보유하게 됐다고 한다. 신도가 되는 방법은 트위터 팔로다. 웃고 말았지만 생각할수록 자신을 진정으로 존중하는 종교라는 생각이 든다.

R304 경전이라는 것도 있다. 그 안에는 이런 재미있는 교리들이 존재한다. ‘자신의 시간을 원치 않는 일에 쓰는 것은 악의 소행이므로 불필요한 시간 외 업무는 거절할 것’ ‘차를 가지고 있다고 해서 직업이 택시 운전사인 것은 아니므로, 운전을 강요해오면 거절할 것’ ‘권리를 행사할 수 없는 회사 따위는 만악의 근원이므로, 유급 휴가를 전부 사용할 것’ 이런 식으로 집단보다 개인을 소중하게 여기는 교리들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 우스갯소리로 예전부터 자기 자신을 믿는 ‘나신교’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나신교 경전에는 개인의 행복을 최우선으로 여기는 교리가 쓰여 있을 것이다.

이제는 1인 가구 천만 시대인데 문화가 바뀌어야 하지 않을까. 그리고 시간이 흘러서 이제는 안다. 술자리가 그렇게나 즐겁지 않았던 이유가 내가 결함이 있고 무리에 어울리지 못하는 성격이어서가 아니라 마음이 통하는 즐거운 사람들을 아직 못 만났던 것이었을 뿐임을. 술을 마시고 싶으면 마시고, 마시고 싶지 않으면 뺀다고 뭐라고 하지 않는 사람들을 결국 만나게 될 것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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