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8년 10월 진압군 점령 직후 여수서국민학교 운동장에서 벌어진 좌익 협조자 색출 장면. 당시 <호남신문> 사진기자 이경모가 찍었다. <한겨레> 자료사진
[편집국에서] 이세영 | 전국부장
사진 한장이 있다. 오래된 흑백사진이다. 학교 운동장으로 보이는 너른 마당에 수천의 인파가 좌우로 패를 나눠 앉아 있다. 무리를 가른 2~3m 폭의 중간 지대에선 무장 군인들이 삼엄한 경계를 펴고 있는데, 담장 뒤편 시가지 쪽에서 시커먼 연기가 맹렬하게 피어오른다. <호남신문> 사진기자 이경모(1926~2001)가 찍은 것을 <동아일보>가 1948년 10월31일치 2면에 받아 실었다. 신문에는 ‘피난민 수용소’로 소개됐으나, 사실은 그해 10월27일 ‘여순사건’ 토벌군의 여수 점령 직후 여수서국민학교에서 벌어진 좌익 협조자 색출 장면이다.
오른쪽에 모여 앉은 이들은 반군 점령기에 좌익에 부역한 혐의를 받는 사람들이다. 촬영 직후 무리에 속해 있던 89명이 학교 뒤편 공터로 끌려가 즉결처분됐다. 처형된 이들 중에는 국민학교 교사 박양기도 있었다. 동료 교사 10명과 함께 총을 맞았는데, 그때 박양기는 열아홉살이었다. 운동장을 좌우로 가른 중간 지대는 양민과 혐의자의 편의적 구분선이 아닌, 삶과 죽음을 가른 절대적 경계선이었다.
오랜 기간 ‘여순 반란’으로 지칭돼온 이 사건의 희생자를 학계와 피해자단체는 1만~1만5000명 정도로 추산한다. 좌익·반군에 의한 학살과 우익·군경에 의한 학살 피해자가 모두 포함된 숫자다. 눈여겨볼 지점은 지난해 ‘여수·순천 10·19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여순사건 특별법) 공포 이후 지금까지 접수된 피해자가 3300여명뿐이라는 사실이다. 전라남도와 해당 시군들이 신고를 적극 독려했는데도 그렇다. 피해자와 유족 다수가 어떤 이유에서인지 자신과 가족이 입은 피해를 밖으로 드러내길 꺼렸다는 얘기다.
학계와 피해자단체는 좌익 혐의자 색출 과정에서 빚어진 반인간적 폭력과 그로 인한 트라우마, 가해·피해의 복잡한 중첩 구조에 그 원인이 있을 것이라 짐작한다. 실제로 진압군이 시가지를 점령한 뒤 가장 먼저 한 일이 주민을 한곳에 모아놓고 ‘빨갱이’를 골라내는 것이었다. 경찰 생존자와 우익 희생자 가족들이 대열을 훑고 다니다 ‘저놈’ 하고 손가락으로 지목하면 그것으로 끝이었다. 열아홉살 박양기도, 여수읍에서 건어물 가게를 하던 그의 아버지 박쇠동(당시 46살)도 그렇게 죽었다. 한 마을 이웃이 원수가 되고, 피해자가 가해자가 되는 폭력의 순환 고리가 이 야만의 시간에 만들어졌다.
물론 우익의 ‘빨갱이 사냥’이 이유 없이 벌어진 건 아니다. 반군 점령 기간 자행된 좌익의 학살 행위가 빌미가 됐다. 실제 반군이 장악했던 여러 지역에서 반군과 지방 좌익에 의해 경찰과 우익 인사들이 무자비하게 살해됐다. 하지만 학살의 규모나 대상, 지속기간에선 좌우익의 차이가 뚜렷했다. 좌익의 학살이 경찰과 한민당 세력, 좌익 탄압에 앞장선 청년단원들에게 집중됐던 것과 달리, 우익의 보복학살은 반란을 일으킨 14연대 군인들과 반군 점령기에 인민위원회 활동을 한 남로당원뿐 아니라 그들에게 밥해준 사람, 분위기에 휩쓸려 부화뇌동한 학생, 반군이 남기고 간 물품을 소지하고 있던 이들 모두에게 무차별적으로 저질러졌던 것이다.
희생자 중에는 평소 경찰과 사이가 좋지 않았던 검사 박찬길, 좌익에 온정적이었던 중학교장 송욱 같은 우익 명망가도 있었다. 이들은 반군에 협조한 증거가 없는데도 심증만으로 붙들려가 처형됐다. 당시 우익에 의한 학살 피해자가 전체 희생자의 95%에 이른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그들 다수는 빨갱이라서 죽은 게 아니라, 죽은 뒤에 빨갱이가 된 경우였다.
여순사건 특별법이 정한 희생자·유족 신고 기간은 내년 1월20일까지다. 남은 기간에 신고 접수가 눈에 띄게 늘어날 가능성은 크지 않아 보인다. 피해자 가운데 상당수가 비극을 겪은 뒤 외지로 떠났거나 피해 사실을 가족에게조차 알리지 않고 생을 마감한 경우가 적지 않은 탓이다.
그나마 고무적인 건 정부가 최근 여순사건 사망자 45명을 국가폭력에 의한 희생자로 처음 인정한 것이다. 지난 6일의 일이다. 별도의 보상이나 지원금은 없다. 특별법이 정한 의료·생활지원금은 생존한 희생자에게만 지원되는데, 이번에 희생자로 결정된 45명은 이미 사망했기 때문이다. 신원을 이룬 45명에는 박쇠동·박양기 부자도 있다.
monad@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