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일(현지시각) 미국 뉴욕에서 글로벌펀드 제7차 재정공약회의가 끝난 뒤 윤석열 대통령이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과 48초간 이야기하고 있다. 뉴욕/연합뉴스
박민희 | 논설위원
윤석열 대통령이 ‘비속어 논란’을 끝없이 연장시키고 있다. 대상이 미국 의회이든 한국 국회이든, 다른 사람들을 함부로 ‘이XX’로 하대해온 윤 대통령의 오만한 태도가 문제였고, 솔직히 해명하고 정중하게 사과하면 벌써 끝났을 일이다. 김은혜 홍보수석의 ‘궤변 해명’으로 불길이 번지더니, 귀국한 대통령은 사과를 거부하고 “동맹 훼손” “진상 규명” 프레임을 들이대며, 언론과 비판자들을 협박하고 나섰다.
2017년 1월20일, 미국 워싱턴에서 도널드 트럼프의 대통령 취임식이 열렸을 때 언론들이 버락 오바마 대통령 취임식 당시 사진과 비교해 참석 인원이 훨씬 적다고 보도했다. 화가 난 트럼프의 지시를 받은 숀 스파이서 백악관 대변인은 “역사상 최대 취임식 인파”가 참석했다고 강변했다. 왜 대변인이 거짓말을 하냐는 언론의 질문에 켈리엔 콘웨이 백악관 고문은 “당신은 거짓말이라고 하지만 스파이서는 ‘대안적 사실’(alternative fact)을 제시했을 뿐”이라는 황당한 주장을 했다. 윤 대통령과 김은혜 수석, 강성 친윤 의원들의 계속되는 말바꾸기와 ‘우기기’는 이들과 뭐가 다른가.
이제는 윤 대통령과 대통령실이 막말 파문을 끝내려는 게 아니라, 오히려 의도적으로 ‘확전’을 선택한 이유를 물을 때다. 김태효 국가안보실 1차장이 15일 “흔쾌히 합의”되었다고 공식 발표한 한미·한일 회담이 전대미문의 실패로 끝나고 외교안보 책임자들을 문책해야 한다는 여론이 높아지자, 그 책임을 지고 물러나야 할 이들이 막말 논란을 키워서 사태를 모면하려는 것 아닌가. 미국과는 인플레이션 감축법(IRA)의 한국산 전기차 차별과 원-달러 통화스와프와 관련한 진전을 이루고, 일본과는 강제동원 피해 해법을 비롯해 한일관계 개선 방안을 ‘그랜드 바겐’으로 풀어나가겠다는 이번 순방 외교의 핵심 목표가 물거품이 되었다는 사실은 어떤 ‘대안적 사실’로도 은폐될 수 없다.
대통령은 자신의 발언에 대해 국민들에게 한마디 설명도 없으면서, 정부는 미국 백악관에는 해명을 했더니 ‘문제가 없다’는 반응을 받았다고 발표했다. 국민들은 안중에 없고 미국만 괜찮다면 문제 없다는 지도자를 국제사회에서 존중할까. 워싱턴의 외교 소식통은 “막말 파문이 알려지면서 미국 정치권에서 윤 대통령을 보는 시선이 좋지 않지만, 정부나 의회가 공식적으로 문제 삼지는 않을 것”이라며 “미국 정치인들이 보기에 윤 대통령은 ‘미국 맘대로 한국을 움직이기 좋은 외교 상대’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윤 대통령과 대통령실의 어설픈 ‘트럼프 흉내내기’는 윤 대통령이 함께 국제질서의 재편을 진지하게 논의할 만한 신뢰할 수 있는 외교 상대가 아니라는 점을 상대국들에게 확인시키고 있는 셈이다. 상대국 정상들은 내심 윤 대통령을 무시하면서도, 한국을 쉽게 움직일 수 있는 장기판의 말 정도로 대하게 되지 않겠는가.
지난 22일 윤석열 대통령과 기시다 일본 총리의 ‘약식 회담’을 생생하게 묘사한 일본 <아사히신문> 기사에서도 윤 대통령에 대한 존중은 찾아볼 수 없다. 못마땅한 듯 무표정으로 조용히 앉아 있는 기시다 일본 총리를 앞에 두고 윤 대통령은 “단시간에 끝나지 않도록 조금이라도 시간을 길게 끌려” 했다면서, “아무 성과가 없는 가운데 만나고 싶다고 해서, 이쪽은 만나지 않아도 되는데 만났다. 일본은 한국에 빚을 만들어 주었다”는 총리실 관계자의 발언까지 전했다. 일본 정치인들은 한·미·일 안보 강화를 강조하는 윤 대통령의 태도를 반기지만, 윤 대통령의 지지율이 떨어질 수록 결국 이명박 전 대통령처럼 지지율 반등을 위해 ‘반일’로 돌변할 것으로 우려한다고 <닛케이 아시아>가 19일 보도했다.
중요한 외교 일정마다 난장판으로 만들어 버리는 윤석열 외교의 또다른 문제는 한국 사회가 국제질서의 대전환에 대해 진지하게 토론할 기회를 빼앗아간다는 점이다. 지난 6월 윤 대통령의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 정상회의 참석은 국제질서의 변화 속 한국이 어떤 역할을 해야할지를 토론하는 계기가 되어야 했지만, 민간인 측근 수행원 동반, 김건희 여사 장신구 논란 등만 남겼을 뿐이다. 이번에도 경제안보와 공급망 재편, 한일관계에 대한 진지한 토론은 ‘날리면’ 논란에 날아가 버렸다.
지금 한국 외교는 국제질서의 변화를 제대로 읽고 대응할 방안을 찾는 데 온 힘을 다해도 부족하다. 국민들은 윤 대통령이 외교 초보라는 것은 탓하지 않는다. 외교·안보·경제안보 등의 영역에서 ‘백지’ 상태임을 겸허하게 인정하고, 전문가들의 다양한 의견에 겸손하게 귀 기울이고, 국제질서 전환기에 걸맞는 전략가를 발탁해 쓰기를 원한다. 용기와 자존감이 높은 지도자는 잘못에 사과하고 성찰하며 앞으로 나갈 수 있지만, 무능하고 고집 센 지도자는 ‘대안적 사실’에 매달린다. 트럼프는 4년 재임 동안 3만573번의 거짓말(<워싱턴포스트>)을 했다. 윤 대통령은 몇번의 거짓말로 나라를 뒤흔들 셈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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